한숨 자고 일어나니 확실히 몸이 훨씬 나아졌어요.

완전히 기운을 회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리 물을 마셔도 해결되지 않던 타는 듯한 갈증이 많이 사라졌어요.

어느덧 저녁 무렵.

해도 지고, 날도 다니기 좋을만큼 선선해져 있었어요.


"우리 나갔다 들어올래? 바람이나 쐬고 오자."
"그러자."

우리는 야경을 보기 제일 좋은 바닷가 공원(불바르 파크)에 다녀오기로 했어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가는데 왠 커다란 동상이 있었어요.


호잘리 학살 기념비였어요.
호잘리 학살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의 전쟁 중에 아르메니아 군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예요.
1992년 2월 26일, 무장을 한 아르메니아 군대가 '호잘리'라는 조그만 민간인 마을을 습격해서 남녀노소를 가지리 않고 마을 주민 전체를 몰살시켰다고 해요.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무자비한 짓을 할 수 있냐'며 아르메니아를 비난하고, 학살이 있었던 날에는 아제르바이잔 방송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하루종일 아르메니아 욕을 해대요.
당시에는 '그냥 마을에 하나 있는 건가보다' 했었는데, 알고보니 굉장히 유명한 장소였어요.
호잘리 학살이 있었던 날에는 바쿠 시민들 뿐만이 아니라 대통령 내외도 이곳을 방문해서 헌화를 한다고 해요.
론니플래닛에는 전혀 나와있지 않지만, 이 기념비는 지하철 하타이(Xətəi)역 바로 앞에 있어요.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사힐 역으로 갔어요.
사힐 역은 불바르 파크에서 매우 가까워서 걸어서 금방 갈 수가 있어요.
어두워지니 우리 뿐만이 아니라 아제르바이잔 사람들도 산책을 하러 불바르 파크로 몰려드는 것 같았어요.
지하철 역은 사람들로 만원이었어요.

"어? 커피 자판기네!"

외국 여행을 다녀보면 은근히 자판기를 보기가 쉽지 않아요.
커피 자판기는 정말 희귀품목.
가격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어요.
커피가 60~80케픽, 차이가 30케픽.

"우리 한 번 사먹어보자."

M씨는 카푸치노를 눌렀고, 저는 차이를 눌렀어요.

"앗, 뜨거!"

컵이 우리나라처럼 두꺼운 종이컵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일회용 비닐컵이다보니 엄청 뜨거웠어요.
기계에서 꺼내자마자 너무 뜨거워서, 한 입 마시기도 전에 차이를 전부 쏟아버렸어요.
아깝기는 했지만, 손에 쏟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보통 여행을 다니면 일행이 많아도 안전문제상 밤늦게 다니는 것은 왠만하면 피하게 되요.
하지만 바쿠 중심가와 불바르 파크는 밤늦게까지 다녀도 크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어요.
일단 자정이 넘도록 사람들이 엄청 많이 돌아다녀요. 
그것도 가족들끼리, 친구들끼리, 연인들끼리 주로 오다보니 어린아이들도 미친 듯이 뛰놀고 자전거타고 해요.
사람들이 몰리니 당연히 경찰들도 군데군데 지키고 있고, 문을 연 가게나 식당, 바들도 많아요.
또한 돈이 많은 나라이다 보니 조명시설을 잘 해놓아서 으슥한 곳이 그닥 많지 않고요.
즉, 너무 외진 곳으로 가지만 않으면 밤에도 충분히 안전하게 다닐 수가 있어요.


아제르바이잔 국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깃대가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개인적으로 아제르바이잔 국기는 참 예쁜 것 같아요.


케밥을 하나 사먹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설렁설렁 걸었어요.
낮에는 그렇게 죽게 덥고 힘들었는데, 저녁이 되니까 정말 걷고 산책하기 좋았어요.
기온으로만 따지면 30도가 넘는 열대야인데, 덥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우리 이쳬리 셰헤르 역에서 지하철 타고 들어갈래?"
"그래."

바쿠는 건물마다 조명시설을 다 해놓아서 야경이 매우 예뻐요.
야경으로만 치자면 유럽의 어느 나라 부럽지 않아요.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바쿠의 대표적인 상징은 '크즈 칼라스 (처녀의 탑)'은 조명 시설이 없어서 밤에는 안 보여요.
아마 지금 공사중인 것은 조명 시설을 해놓으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밤의 이쳬리 셰헤르.

이쳬리 셰헤르의 골목들은 좀 어둑하고 으슥한 편이에요.



니자미 문학 박물관.


유명한 건물 아니예요.
그냥 평범한 건물이에요.
에너지 절약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 전기를 펑펑 낭비하고 있어요.


구시가에서 '이쳬리 셰헤르' 지하쳘 역으로 올라오는 길에는 한 남자의 동상이 있어요.
이 아저씨가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바쿠에 100채의 건물을 지은 아저씨예요.


지하철역 가는 길.




'이쳬리 셰헤르' 역.
얼핏 보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같았어요.


호텔에 돌아오니 밤 10시가 넘어있었어요.
근처에 있는 조그만 슈퍼가 그 시간까지 문을 열고 있어서, 간단한 간식거리와 마실 것을 사기로 했어요.

"저기 와인도 파네. 우리 와인 하나 사가자."

낮에 만난 아제르바이잔 친구가 아제르바이잔은 와인이 매우 유명하다고 했어요.

"어떤 와인이 맛있어요?"
"다 좋아. 다 맛있는 와인이야."

파는 사람이 당연히 맛이 없다고 할리가 없지요.
가격표을 비교해보다가 'Qara Sire' 라는 아제르바이잔산 와인을 한 병 샀어요.
가격은 2마나트.

'그런데 이거 어떻게 따지?'

"혹시 와인 오프너도 파시나요?"
"그런 건 없어. 그냥 코르크 마개를 손으로 눌러서 병 안으로 넣어버려

전혀 생각 외의 방법.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계산을 하고 나왔어요.
호텔에 돌아와서 와인을 마셔봤어요.
생각보다 맛은 괜찮은 편이었어요.
조금 덟은 맛이 있기는 했지만, 3천원짜리 와인에 많은 것을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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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티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