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캐스케이드를 오르느라 너무 무리가 했는지 다리에는 알이 배기고, 발에는 물집이 잡혔어요.

호스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한 중년의 아저씨도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왔어요.

얼핏 보니 터키인인 것 같아서 슬쩍 말을 걸어보니, 역시 터키인이었어요.

그 분의 이름은 케말이었고, 엔지니어링 관련 일을 하고 계신다고 했어요.

지금은 일이 없어서 여행을 다니는 중인데, 아침에 막 예레반에 도착하셨다고 했어요.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관계는 극도로 안 좋아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관계처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철천지 원수지간까지는 아니지만, 오스만 제국 말기의 아르메니아인 학살문제에 대한 논란이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아서 그 못지 않게 안 좋은 관계예요.

두 나라 사이에 국경도 폐쇄되어 있어 터키에서 아르메니아를 가기 위해서는 그루지아나 이란을 반드시 거쳐야할 정도예요.

그런데 예레반에서 터키인 관광객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계속 말이 안 통하다가 그나마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을 만나니 반갑기도 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어요.


"같이 에치미아진 가실래요?"


에치미아진은 바티칸과 같은 아르메니아 정교의 본산지로, 매우 성스럽고 중요한 곳이예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기도 하고요.

사진이 거의 없는 론니플래닛에도 작게나마 컬러 사진이 나올 정도예요.

예레반에서도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그닥 멀지 않은 장소라서 오늘 보러갈 생각이었는데, 일행이 한 명 더 생겨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케말 아저씨에게 론니플래닛에 나온 사진을 보여주면서 같이 가자고 하니, 관심을 보이시며 같이 가기로 했어요.


아침을 먹고 나와 호스텔 직원에게 물어보니 Movses Khorenatsi 거리에 에치미아진 가는 미니버스가 수시로 있다고 했어요.

그곳에 비허가 택시들도 있는데, 한 사람당 300디람이면 된다고 알려주었어요.


직원이 알려준 그 거리에 가니 아저씨 두셋이 나타나 손에 든 100디람짜리 동전 3개를 보여주며 에치미아진에 간다고 호객행위를 했어요.

비허가 택시를 운전하는 운전 기사인 듯 했어요.

중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쉐어드 택시처럼 승객이 4명이 되면 출발하는데, 우리는 3명이었고 이미 한 사람이 타고 있어서 바로 출발했어요.

작은 차에 성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타니 조금 비좁기는 했지만, 길도 안 막히고 꽤 편하게 올 수 있었어요.













에치미아진 교회 중앙 출입구.

입구 옆에는 책과 함께 간단한 기념품 종류를 파는 서점이 있었어요.

평소 여행하는 나라마다 사진 엽서를 모으기 때문에, 여기서도 사진 엽서 몇 장을 구입했어요.




에치미아진 교회 본당에 해당하는 Mayr Tachar.

입구에 이란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 세 명이 앉아있었는데, 저와 친구보다 한 발짝 앞서간 케말 아저씨가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괜히 궁금해져서 저도 말을 걸었어요.


"쇼마 이라니 하스티드? (당신들은 이란 사람입니까?)"


예전에 이란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란어 공부를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아랍 문자가 너무 짜증나서 며칠 만에 때려친 적이 있어요.

그래도 조금 봤다고 몇 문장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문장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이란어를 하는 저를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마구 이란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어요.

분위기상 어디서 이란어를 배웠냐는 것 같았지만, 그걸 대답할만큼 이란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영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이란어를 왜 배우나요?"

"이란에 관심도 있고, 나중에 이란에 여행을 가보고 싶어서요."


그러니 매우 좋아하면서, 나중에 이란에 여행을 오게 되면 자신들에게 꼭 연락을 달라고 했어요.

그 분들은 이란의 한 방송사에서 온 방송팀이라고 했어요.

이곳에는 아르메니아 정교 대주교를 인터뷰 하려고 왔는데, 원하면 와서 옆에서 봐도 된다고 했어요.




곧 검은 사제복을 입은 대주교님이 나오셨고, 촬영이 시작했어요.

정확한 인터뷰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무슬림의 시각에서 기독교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 듯 했어요.

케말 아저씨는 경청을 하시면서 종종 수첩에 메모를 하시기도 하셨지만, 저와 친구는 기독교인도 아닐 뿐더러 종교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주변을 구경하러 다녔어요.




Mayr Tachar 입구와 천장 장식.





찌는 듯이 더운 바깥과는 달리 교회 안은 매우 시원했어요.

아르메니아에게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성스러운 장소이니만큼 매우 엄숙한 분위기일거라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어요.

한쪽에서는 촛불에 불을 붙이며 기도를 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저와 친구도 다리가 아파서 한쪽에 앉으니 외국인인 우리를 신기하게 여긴 아이들이 다가와서 영어로 말을 걸기도 했어요.





교회 부지 내에는 종교와 관련된 비석이나 시설 뿐만 아니라 조경도 잘 되어 있고 벤치도 곳곳에 많이 놓여있었어요.

음수대가 있어서 시원한 물을 공짜로 마실 수도 있었어요.

사람들은 무겁고 엄숙한 장소에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집 근처 공원에 오는 것처럼 자유롭게 오는 것 같았어요.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있고, 그늘진 벤치에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에치미아진 교회 중앙 출입구.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안에서 보니 다른 건물들과 서로 잘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Manougian 박물관.



에치미아진 교회 한쪽에서는 또 다른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어요.

실상 본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최근에 새로 지은 건물들인 듯 했어요.



넓은 부지에 건물들이 여기저기 듬성듬성 위치해잇어서 이곳 저곳 막 돌아다니다가 교회 외곽에 있는 건물에 들어갔어요.

다른 곳은 사람들은 유난히 많은데 이곳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왠지 느낌이 달랐어요.

우리를 본 한 수도사분이 여기는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면서 나가라고 해서 쫓겨났어요.

아마 정교 사제분들이 생활하는 장소인 듯했어요.

빨래줄에는 옷과 속옷들이 걸려있고, 세탁기가 열심히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케말 아저씨는 인터뷰를 전부 보고 난 이후 따로 관광을 하다가 만났어요.

교회 밖으로 나와서 근처에 보이는 다른 교회로 향했어요.













Surp Gayane 교회.

St Gayane 는 301년에 순교한 아르메니아 정교의 성녀로, 이 교회는 7세기에 그녀의 무덤 위에 지어졌다고 해요.

이곳도 에치미아진 교회와 마찬가지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기도 해요.






이 교회는 630년에 처음 지어졌고, 1652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해요.


교회 정원에는 뽕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흰 오디가 주렁주렁 달려있었어요.

케말 아저씨는 저와 친구를 위해서 오디를 따주셨어요.

한국에서 검은 색깔의 오디만 봐서 터키에서 흰 오디를 파는 것을 보고 덜 익은 걸 파는 줄 알았다고 했다니 아저씨가 매우 즐거워하셨어요.


이곳을 보고 나니 점심 무렵.

택시를 타고 예레반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다시 에치미아진 근처 택시를 내렸던 장소를 찾아가니 승용차가 한 대가 서있었어요.

예레반에 가느냐고 물어보니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어요.


비허가 택시를 찾아가다보니 교회의 다른 출구까지 나왔어요.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본 남자들이 손에 100디람짜리 동전 세 개를 보여주며, 예레반에 간다고 했어요.

우리가 탄 지 얼마 안 되어서 한 사람이 더 탔고, 바로 출발했어요.


택시를 우리를 예레반 슈카 시장 건너편에 내려주었어요.

케말 아저씨는 예레반을 둘러보고 싶다면서 시장으로 갔고, 우리는 근처 케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숙소로 돌아갔어요.



Posted by 히티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