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히타이트와 이집트 간의 숙명의 대 전투
당시 이집트는 람세스 2세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방대한 도시들과 기념물들을 건설하여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을 얻고 있었다. 람세스 2세는 이집트와 세력 확장에서 부딪히게 된 히타이트 제국에게 강력한 이집트의 강인함과 용맹을 드러내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강력한 이집트의 이미지를 통해 히타이트 제국이 이집트를 쉽게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두 제국은 숙명적인 전쟁의 대서사시를 장식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하게 되었다. 히타이트 제국과 이집트가 가나안 지역에서 벌인 카데시 전투는 역사상 가장 긴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두 대국에서 가장 많은 장병들이 참전한 대규모 전투로서 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집트는 전차병을 포함하여 2만 명의 장병을 동원했고 히타이트도 3만 5천 명이나 동원했다.
이집트의 람세스 2세는 직접 5천 명의 장병으로 구성된 아몬 사단을 지휘하였고, 역시 각각 5천 명으로 구성된 라, 프타, 세트로 이름 지은 세 개의 사단이 뒤따르도록 했다. 각 사단은 250명으로 구성된 20개의 중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나아르 군은 가나안인 외인부대 병사들로 구성된 특공대로, 이들의 도착은 람세스가 미리부터 계획해 둔 작전이었는데 절묘하게 그 시기가 맞아 들어간 것이다. 포위망에서 구출된 람세스 2세는 오히려 공격으로 나서 히타이트 전차병들을 카데시 남쪽으로 몰아낸다. 당시의 전투 상황은 이집트의 데르 대신전의 벽에 기록되어 있다.
카데시 전투로부터 15년이 경과한 후, 전쟁에 지친 두 나라는 상호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국제 조약이다. 놀랍게도 이 조약의 조문은 현대 국가 간에 체결되는 조약과 완전히 같은 체계였다. 이 조약에는 양국은 서로의 형제국가임을 선언하고 국난이 있을 때 상호 지원토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만약에 히타이트에 외적이 들어오고 위대한 왕, 히타이트 왕 하투실리스가 람세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적에 대해서, 나를 도우라’라고 말씀한다면, 위대한 왕, 이집트의 국왕 람세스는 그 보병대와 전차대를 파견하여 적을 살육하고 히타이트를 위하여 복수할 것이다”
물론 동일한 문구로 이집트가 공격당했을 때 히타이트 군이 원조한다는 조항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두 나라의 왕권 보호, 도망자의 추방과 망명자에 대한 사면이 적혀 있다. 불가침 조약도 체결되었다.
“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하여 약탈하지 않는다”
이러한 조약 내용이 적인 유물이 3천년이 지난 후 이집트와 히타이트 두 곳에서 함께 발굴이 되었다.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샤와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 보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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