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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일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희뿌연 하늘이 보였다.



창밖을 내다보니 겨울왕국이 부럽지 않은 풍경이 펼쳐져있다.

올해 첫 눈이자 이사오고 나서 처음 본 눈이다.



낭만은 짧고, 현실은 길다.

세수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기모 티셔츠를 입고, 두꺼운 양말과 패딩 신발까지 갖춰 신은 뒤 집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에 살았을 때에는 눈이 오면 경비아저씨가 바로바로 치워줬고, 도로는 제설차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면서 염화칼슘을 뿌려서 다 녹아있다.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라 제설작업은 신속하게 잘 해주는 편이다.

하지만 시골 주택은 누구 하나 눈 치워주는 사람이 없다.

도시와 아주 멀지는 않으니 고립되지는 않지만, 내 집 눈은 스스로 치워야한다.



제설을 하기 전에 진과 보드카부터 눈 속에 파묻었다.

예전에 시베리아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불곰 같이 생긴 러시아 아저씨들이 위치 분간도 안 되는 눈 속에 보드카 한 병을 휙 던지는 장면이 나왔다.

봄이 되어서 눈이 녹고 나면 그 보드카를 찾아서 마신다고 한다.

시베리아를 가기는 싫지만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해봐야지.

주정뱅이는 어쩔 수 없다.




폭설만 오면 생각나는 추억의 노래를 들으면서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집에 넉가래가 하나 밖에 없어서 한 사람은 넉가래로 눈을 밀고, 나는 빗자루로 눈을 쓸었다.

일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제설이라니.

그닥 도움이 안 되지만 20여 분 가량 비질을 하니 손을 시려도 몸에서는 제법 열이 났다.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왜 인도의 눈을 안 치우냐며 툴툴거리기도 했는데, 내가 집에서 따숩고 편하게 등지지고 있을 동안 누군가는 찬바람 맞으며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집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는 얼추 다 눈을 치웠다.

도로는 경사가 있어서 얼면 미끄러울 거 같아 염화칼슘도 뿌렸다.

발목이 약해서 자주 넘어지고 삐는데, 병원 가기 두려운 요즘이다.



하지만 제설을 하는 와중에도 눈은 계속 왔고, 기껏 치우고 돌아보면 다시 눈이 쌓여있었다.

보기만 이쁘지, 하늘에서 내리는 폐기물이 따로 없다.

어차피 지금 치워봐야 더 쌓일테고, 급한 불은 얼추 껐으니 정리했다.




현실에 여유가 생기면 다시 낭만의 시간이 찾아온다.

어차피 옷도 다 눈 맞았겠다 동네 산책을 하러 나갔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뽀득거리며 발자국을 남겼다.

영화 '러브 레터' 가 따로 있나.

이 날씨에 "오겡기데스카" 만 하면 다 러브레터지.





나뭇잎에도, 우체통에서 눈이 소복소복 쌓인다.



자연산 크리스마스 트리.


갈 데도 없고, 갈 수도 없어서 집에 돌아왔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내려마시고 나니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잠이 솔솔 온다.

낮잠 한 숨 자고 일어났는데, 여전히 눈은 소복소복 내린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한국편을 보면, 김태리 씨가 눈 속에서 배추를 뜯어서 배추된장국을 끓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배추 대신 묻어놨던 텐커레이 No.10 진과 스미노프 보드카를 캐냈다.



첫눈 에디션이 쨍하게 잘 나왔다.

스트레이트로 한 모금씩 마셔봤는데, 속이 저릿저릿한 게 제대로다다.

보드카로는 카이피로스카 Caipiroska 를, 진으로는 김렛 Gimlet 을 만들어마셨다.

눈 온 게 좋은 점도 있구나.





(재미있게 보셨으면 아래의 를 눌러주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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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티틀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자연산 크리스마스트리 너무 이뻐요ㅋㅋㅋ

    2020.12.14 09:5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진짜 사이즈나 모양이나 딱 크리스마스 트리였어요.
      저기에다가 가랜드 같은 거만 걸어놓으면 되겠더라구요ㅎㅎ

      2020.12.14 12:18 신고 [ ADDR : EDIT/ DEL ]
  2. 첫눈은 왔는데 쌓인 모습을 상상했는데
    오면서 바로 다 녹아서 눈을 구경 못했는데
    이렇게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어서 좋네요

    2020.12.14 09:5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아침에 눈 뜨자마자 창밖에 눈이 수북수북 쌓였어요.
      도시는 금방 녹아서 질퍽거리는데, 여기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하얀 색이 잘 유지되더라구요.

      2020.12.14 12:18 신고 [ ADDR : EDIT/ DEL ]
  3. 저는 함박눈의 낭만만을 느끼고 싶었지만
    제가 있는 경기도는 아침에 나가보니 쌓이진 않았더라구요 ㅠㅠ

    2020.12.14 10:1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함박눈의 낭만도 있지만, 눈 치우는 건 참 거시기했습니다.
      치우고 나서 돌아서니 또 쌓여있는게 빡쳐요ㅋㅋㅋ

      2020.12.14 12:17 신고 [ ADDR : EDIT/ DEL ]
  4. 민간인의 군대 제설 체험(?)
    저기다가 밀러 2캔 딱 던져놓고 싶네요 크으... 물론 매일 저러면 집 밖에 안 나갈겁니다(!) ㅋㅋ ㅠ

    2020.12.14 11:2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저 날은 진짜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 하고,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눈 속에 묻어둔 맥주.. 겁나 시원하겠네요.
      단, 오늘 같은 영하의 날씨에는 얼어터질 수 있으니 주의를ㅋㅋㅋ

      2020.12.14 12:16 신고 [ ADDR : EDIT/ DEL ]
  5. 보드카 파묻기 한번 해보고 싶네요ㅜㅜㅋㅋㅋ
    제설은 힘들지만 그래도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설레네요 :)

    2020.12.14 12:5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시베리아 불곰 아저씨들처럼 눈 속에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보드카가 한 병 밖에 없어서ㅠㅠ
      증류주는 잘 얼지 않으니까 겨울에는 옥상에 놔둘까 고민 중입니다ㅋㅋㅋ

      2020.12.15 09:10 신고 [ ADDR : EDIT/ DEL ]
  6. 서울에 내린 눈은 금방 녹아버려서 잠깐 좋다 말았네요.
    직접 치워야 하니 낭만과는 별개로 힘든점도 있겠군요.
    보드카를 파묻는거 이색적이네요. ^^

    2020.12.14 13:1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주변 사람들이 다 '알중' 이라고 하더라구요.
      눈 보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게 술 묻기냐고ㅋㅋㅋㅋ
      이제 홍천에서는 근무 안 하시는 건가요?
      이번에 홍천 서석 날씨가 영하 20도 찍었다는데요.

      2020.12.15 09:09 신고 [ ADDR : EDIT/ DEL ]
  7. 안녕하세요 눈이라니 군대 생각나는군요 ... ㅎㅎ 추억인듯 추억아닌 추억 무튼 구독하고갈께요~~ 맞구독 부탁드립니다ㅎㅎㅎ

    2020.12.14 15:0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새벽부터 눈이 온 터라 군대에서는 일찍 일어나서 제설작업에 동원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강원도에 살아도 이렇게 눈이 쌓인 풍경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았어요.
      도시에서는 길이 얼어서 사고 나는 거 대비해서 제설작업을 다 하니까요.

      2020.12.15 09:09 신고 [ ADDR : EDIT/ DEL ]
  8. 오왕... 사진으로 볼 때는 예술. 직접 치울라면... 눙물.. 운전하려면... 욕나오는 풍경이려나요 ^^ 보드카 멋있네요

    2020.12.14 19:5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술 묻어둔 게 제일 만족스러웠습니다.
      눈은 다 치웠는데 요즘 날씨가 추워서 술을 바깥에 내놓을까 고민 중이에요ㅎㅎㅎ

      2020.12.15 09:07 신고 [ ADDR : EDIT/ DEL ]
  9. 힘드셨다는데 제게는 너무 낭만적인 느낌 뿐인데요. 오겡끼데스까~~~~~~~~오겡끼데스까~~~~~~~ㅎㅎ

    2020.12.16 19:3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오뎅드셨쑤까~~~~~
      저도 눈 치울 때는 손시리고 짜증났지만, 그냥 구경다닐 때는 나름 낭만있더라구요.
      잠깐 구경만하고 돌아온 뒤,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갔지만요ㅋㅋㅋ

      2020.12.16 22:36 신고 [ ADDR : EDIT/ DEL ]
  10. 캬~ 눈이 내렸군요!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 ^^ 친구 동생이 공군입대했는데 눈을 그렇게 싫어하더라구요. ㅎㅎㅎ
    눈내린 동네 풍경이 넘 이쁘네요. 피닉스는 눈이 안 내리는 곳이라 눈보면 그냥 심쿵해요.
    배추 대신 진과 보드카. 더 멋져요. ㅎㅎ

    2020.12.18 02:5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공군입대하셨으면 눈을 싫어할만도 하겠어요.
      그 넓은 활주로의 눈을 다 치워야할텐데요ㅋㅋㅋ
      공항 같은 데서 일하면 눈 치우고, 새쫓고 가는 게 중요 업무 중 하나라고 하더라구요.
      술은 눈속에서 캐다가 맛있게 마셨습니다ㅋㅋㅋㅋㅋ

      2020.12.18 14:32 신고 [ ADDR : EDIT/ DEL ]
  11. 우와 여기 어딘가요? 진짜 좋은 데 사시네요.
    그리고 눈 진짜 많이 왔네요.
    좋다 좋다 좋으다. 😁

    2020.12.18 11:2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저희 동네입니다ㅋㅋㅋ
      폭설 이후 계속 혹한이라서 볕드는 데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눈이 쌓여있어요.
      길도 군데군데 얼어있어서 다닐 때 조심해서 다녀야합니다ㅠㅠ

      2020.12.18 14:31 신고 [ ADDR : EDIT/ DEL ]
  12. 알렌 ◇

    관리자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댓글입니다

    2021.09.14 23:12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