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르르륵~


배가 아파서 눈을 떴어요. 

일어나자마자 바로 화장실로 직행.

계속 배가 콕콕 거리고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했지만, 단순한 물갈이일거라 생각했어요.

전날 새벽까지 손빨래를 하고 말리느라 한바탕 푸닥거리를 했더니 호텔에서 주는 아침시간이 지나도록 늦잠을 잤어요.


오늘은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아제르바이잔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

제가 아제르바이잔에 간다고 하자 매우 좋아하면서 꼭 한 번 만나자고 약속을 했어요.

며칠 간의 여독 때문에 피곤했지만, 다행히 배가 아파 일어난 덕에 약속시간에 늦지 않게 일어날 수 있었어요. 


친구는 근처 지하철 역까지 마중나와 주었어요.

같이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도 하고, 바쿠 구경도 하고 싶었으나, 친구가 또 선약이 있다길래 아쉽지만 시내에서 간단히 밥 한끼 먹고 헤어지기로 했어요. 


시내로 가기 위해서 지하철을 탔어요. 

바쿠의 지하철은 무서워요.

에스컬레이터가 얼마나 빠른지 우리나라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걸어가는 것보다 더 속도감이 있어요.

발을 한 발 내딛기가 겁이 날 정도예요.

게다가 지하철을 얼마나 땅굴로 파놓았는지 에스컬레이터가 엄청 길어요.

정확한 길이는 알 수 없지만,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끝이 안 보여요.

사고에 대비해서 에스컬레이터 끝지점에 초소를 만들어 놓고 경비원(주로 아줌마)이 지키고 있어요.

원래는 만약 에스컬레이터에서 사고가 날 경우 빨리 에스컬레이터를 정지시키게 되어있지만, 사고가 그렇게 자주 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은 지루함에 딴 짓을 하거나 잠을 자요.

즉, '니 안전은 니가 알아서 챙겨라' 라는 아주 바람직한 교훈을 제공해주고 있어요.


지하철에는 냉난방 시설 따위는 역시 갖추어져 있지 않아요.

사실 땅속이라 연중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고, 햇살이 뜨겁고 건조한 이 나라 기후의 특성상 냉방 장치가 없어도 그렇게 끔찍하게 불쾌할 정도까지는 아니예요.

하지만 여름이라 더 시원하라고 그런건지 지하철이 창문을 열어놓고 운행을 해요.

얼마나 소음이 심한지 전화 통화는 거녕 옆사람과 이야기도 할 수가 없어요. 

지하철 문도 사정 없이 쾅쾅 닫아버려서 손이라고 끼었다가는 잘릴 것 같았어요.

여러 모로 스릴 만점 지하철. 



'이쳬리 쉐헤르(구시가지 라는 뜻)' 역이에요. 

론니플래닛에는 '바크 소비에트 (Baki Soveti)'역이라고 나와있지만, 새로 리모델링을 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했어요. 

이 역은 새로 꾸민 역이라서 그런지 그나마 에스컬레이터 속도가 느렸어요.

이름답게 바로 구시가지 들어가는 입구 옆에 붙어있어요.


친구가 자기가 밥을 사겠다며 한 터키식 식당에 데려갔어요.

바쿠에서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 밥이에요.

메뉴를 보니 음식과 음료를 시키면 한 사람당 최소 10-15마나트는 계산해야했어요.

여행 다닐 때 그닥 식도락을 즐기는 성격도 아닌데, 내 돈 주고 먹기에는 너무 비싸고 돈 아까워요.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고 싶었지만, 배는 아침부터 꾸룩 꾸룩 꾸루루룩.

적당히 케밥만 먹고 나머지는 남겼어요.


"음식이 맛이 없었나요?"


음식을 많이 남기자 종업원이 걱정스럽게 물어봤어요.


"매우 맛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 속이 안 좋아서요."


그제야 종업원이 끄덕거리며, 차이(홍차)를 가져다주겠다고 했어요.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물은 돈을 받아도 빵과 차는 공짜로 줘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설탕 듬뿍 탄 공짜 차를 안 마시면 마치 식사가 덜 끝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요.

종업원은 외국인이 자기네 말을 한다고 매우 좋아하면서 차이를 금방 가져다 줬어요.



응? 왠 레몬이지?



이렇게 넣어먹는 거래요. 

그리고 자신의 입맛에 따라 설탕을 가미해주면 정말 리얼!!! 레몬티가 되요.

이것이 아제르바이잔 스타일!


차를 마시면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아제르바이잔 오니까 어때요?"

"어제 바닷가 갔는데, 진짜 멋있었어요. 밤에 사람들 정말 많더라고요. 그런데 낮에는 너무 더웠어요."

"낮에는 집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있는 게 제일 좋아요. 그리고 해 지고 나면 밖에 나가요."


어쩐지.. 낮에 길거리에 사람이 뜸한 이유가 있었어요.
나만 더운 게 아니었구나.

"바쿠는 마치 유럽 도시 같아요. 정말 놀랐어요."

그러자 친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우리나라에는 땅 조금 가지고 있던 평범한 사람이 그 땅에 도로가 들어서거나 개발이 되어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이 있듯이, 아제르바이잔에도 평범한 사람이 자기 땅에서 석유가 나오면서 한순간에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대요.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남자가 자기 땅에 유전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대요.
그런데 그 남자가 '이것은 내가 정당히 일해서 번 돈이 아니라, 단지 운이 좋아서 생긴 돈일 뿐이다.' 라고 생각해서 바쿠에 100채의 집을 짓기로 결심했대요.
당시 유럽에서 일하던 최고의 건축가와 기술자들을 모두 바쿠로 불러들여서 최신 유럽스타일로 집을 짓게했다고 해요.
99채를 다 짓고, 100채를 짓던 중 그 남자는 세상을 떠나고, 사후에 100번째 집이 완성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바쿠의 건물들이 유럽처럼 꾸며진 것이라고 했어요.


친구랑은 헤어지고, M씨와 같이 쉬르반 사라이에 갔어요.
아제르바이잔 친구가 꼭 가보라고 추천한 장소 중 하나.
쉬르반 사라이는 이쳬리 쉐헤르의 거의 꼭대기쯤 위치해 있어요.


입장료는 국제 학생증 지참시 학생 60케픽에 카메라는 2마나트를 따로 내야해요.
두 사람이 모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는데, 카메라 요금은 한 사람 것만 받았어요.



전망도 좋고 조용하다 보니 주변 동네주민이나 연인들이 와서 시간을 보내는 장소인 것 같아요.
표를 팔았던 직원 아주머니도 그늘에 앉아 다른 아주머니와 수다 떨기가 바빴어요.
15세기 궁전과 현대 최신식 건물이 한눈에 보인다는 사실이 매우 이국적으로 느껴졌어요.



날은 계속 더워지고, 몸은 자꾸 이상 신호를 보내왔어요.
아침부터 속도 안 좋고 배도 계속 아팠지만, 약속도 있는 데다가 여행 시작한지 얼마 안 되서 속 좀 안 좋다고 호텔방 신세를 지고 있을 수가 없어서 참고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는 걸 그 날 처음 느꼈어요.
머리도 뱅뱅 돌고, 다리는 완전히 풀려서 서있는 것조차도 힘들게 느껴지고,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만 더 심해질 뿐이었어요.

일단 M씨에게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사진찍으라고 한 뒤, 아무데나 걸터앉았어요.
이미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있는대로 늘어져서 관광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어요.

"더위 먹었네요."

안 그래도 더위를 잘 견디는 사람도 아닌데다가,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한국은 이상기후로 유난히 날씨가 선선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40도가 넘는 날씨.
더군다나 며칠동안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해서 지쳐있는 상태.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 밖에 안 하는데 비축한 체력이 있을리가 없지요.

관광은 대강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간단한 샤워를 한 뒤, 소금을 먹고 한숨 잠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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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티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