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기운에 정말 푹 자고 일어났다.
아침 햇살도 맞고 날씨도 확인할 겸 발코니로 나갔다.
제일 먼저 눈에 보인 것은 벽에 붙은 도마뱀.
징그럽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작고 슉슉 빨리 돌아다니는게 너무 귀여웠다.
파충류를 좋아하진 않지만, 한국에 데려가서 애완용으로 한 마리 키우고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날씨는 맑다못해 아침 댓바람부터 태양열에 달아오르고 있었다.
조식은 인도네시아 음식으로 구성된 뷔페였다.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전통 의상을 입은 악사 분도 오셔서 식사 시간 내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도 불러주셨다.
밝을 때 보는 숙소는 더 멋졌다.
정원도 넓고, 건물들 사이도 넓게 떨어져있어서 마치 펜션 같은 느낌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 환전도 하고 구경도 하기 위해 다시 말리오보로 거리로 향했다.
호텔이 위치해있는 파쿠알라만 지역에도 모스크라든지 볼거리가 좀 있는 듯 했다.
다시 트랜스 족자 버스 정류장으로 왔다.
"Selamat pagi (굿모닝)"
인도네시아 인사말 한 마디에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진다.
"족자카르타역 어떻게 가요?"
"4A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간 다음에, 3A 버스를 타면 되요."
말리오보로 거리로 가는 거라면 그냥 전날에 탔던 버스를 타고 가면 되지만, 환전소는 족자카르타역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가보기로 했어요.
4A 버스가 오자 직원이 빨리 타라고 손짓을 한다.
아침 이른시간이라 버스가 한산하다.
채 10여분도 가지 않아서 차장이 우리를 부른다.
"Stasiun Jogjakarta? (족자카르타역)?"
"Yes, yes."
차장이 내리라고 하니 일단 내렸다.
여긴 어디지...?
처음보는 낯선 장소에 내려버렸다.
그래도 아까 그 정류장 직원의 말이 맞다면 여기서 3A버스를 갈아타야한다.
20분 남짓을 기다리니 3A 버스가 왔다.
"Stasiun Jogjakarta?"
"Yes, yes."
간다고 하니 버스에 올라탔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친절하고 영어도 곧잘 알아들어서 어디서 내려야할지 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차장이 우리가 내릴 곳을 알고 있는 이상, 때가 되면 알아서 내리라고 챙겨준다.
족자카르타 역에 도착했다고 해서 내리긴 내렸는데, 영 낯선 곳이다.
철길이 나오고 건물이 하나 있었다.
통과하면 바로 어제 봤던 말리오보로 거리 쪽이 나올 거 같은데, 통과할 수가 없어서 뺑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아침 9시 남짓 밖에 안 되었는데도 날은 한낮처럼 더웠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환전소에 도착했다.
자카르타 감비르역과는 달리 은행 같이 깔끔한 분위기와 유니폼을 갖춰입은 직원들이 일하고있고, 무려 에어컨도 틀어져있었다.
일처리도 깔끔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지폐가 구겨졌다면서 환율을 깎기 일쑤라고 하던데, 가지고 다니면서 조금 구겨지고 접힌 지폐도 별말없이 받아주었다.
환율도 공지된 환율 그대로였고, 영수증까지 발행해줬다.
환전을 하고 나니 감비르역에서 얼마나 환율을 후려쳤는지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여기서 환전을 한 번 더했는데, 소액권까지 공지한 환율 그대로 바꿔주어서 인도네시아 여행내내 정말 유용했다.
환전을 하고 나니 좀 안심이 된다.
론니플래닛 가이드북을 들고서 근처에 볼거리가 있나 뒤지다보니 '투구 기념탑 Tugu Monument' 라는 곳이 근처에 있었다.
지도를 보고 가늠해보니 얼핏 500m 정도 되는 거 같다.
론니플래닛 가이드북을 들고서 근처에 볼거리가 있나 뒤지다보니 '투구 기념탑 Tugu Monument' 라는 곳이 근처에 있었다.
지도를 보고 가늠해보니 얼핏 500m 정도 되는 거 같다.
그닥 멀지 않으니 잠시 보고 오자는 생각에 걷기 시작했다.
500m가 이렇게 멀었나?
가도가도 보이지가 않는다.
날씨가 더우니 더욱 몸이 축축 처진다.
그냥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으나 이제까지 걸어온게 아쉬워서라도 아득바득 계속 걸었다.
투구 기념탑
이게 대체 뭐야!!!
힘들게 걸어온 거 치고는 너무 허무했다.
족자카르타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이라고 하는데, 그냥 로터리에 장식해준 도시 조경물이라도 해도 믿을 거 같았다.
속으로 올라오는 욕을 꾸욱 누르면서 다시 말리오보로 거리로 돌아갔다.
도로 중간중간 음료를 파는 노점들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의자에 앉거나 혹은 그늘진 곳 바닥에 주저앉아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덥고 목말라서 우리도 뭐라도 마시고 가기로 했다.
일하시는 아저씨 뒤로 커피 믹스나 주스 가루가 주렁주렁 널려있다.
"굿데이 커피 아이스 되나요?"
아저씨는 손으로 가리킨 커피 믹스 하나를 무심하게 가위로 잘라서 유리잔에 담았다.
그 자체만으로도 달텐데 설탕을 크게 한 스푼 넣었다.
그리고는 숯불 위에서 바그르르 끓고있는 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을 부었고, 아이스박스에서 얼음을 꺼내어 담아주었다.
아이스커피 완성!
그늘에 앉아서 호로록 마시는 시원하고 달콤한 커피 한 잔은 무더운 날씨와 피로, 그간의 짜증을 잊게해주었다.
몇 백원 밖에 되지 않는 저렴한 가격은 덤이다.
평소에는 단맛이 강한 커피를 그닥 좋아하지 않아 아메리카노 종류만 마셨는데, 이렇게 덥고 습한 나라에서는 단맛이 강한 커피를 자꾸 찾게 된다.
가만히 있어도 기력이 떨어지는 날씨에 당분으로라도 에너지를 보충하지 않으면 정말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더위에 달아오른 얼굴도 식히고, 땀도 어느 정도 마르자 다시 길을 걸었다.
족자카르타에서 처음 온 바로 그 장소에 다시 도착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또 기차가 지나간다.
다행히 지금은 차단기 밖이다.
말리오보로 거리 입구에 도착했다.
밤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왔다고 왠지 반갑고 익숙하다.
말리오보로 거리는 활기찼고, 사람과 물건들로 넘쳐났다.
이것저것 볼거리들이 쏠쏠하게 있었다.
"헬로, 뭐 찾고 있어요?"
"그냥 구경 중이에요."
"이 근처에 바틱 박물관 있는데 볼래요?"
왠지 좀 의심스럽긴 했지만, 일행도 있고 별 일이야 있겠냐 싶어서 아저씨를 따라갔다.
아저씨는 어느 건물 2층으로 우리를 데리러 갔다.
바틱 Batik 은 동남아 지역에서 1400년 전부터 전해내려오는 염색 방법으로 만든 옷감이다.
인도네시아 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등지에서도 제작되지만, 그 중에서도 족자카르타가 있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바틱이 제일 발달해서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도 지정되었다고 한다.
아저씨는 바틱을 만드는 법에 대해서 영어로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천 위에 왁스와 바늘처럼 뾰족한 도구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한 겹 칠한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왁스를 덧입히고, 색을 칠해 채색하는데, 그 과정을 원하는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한다.
그림을 다 그리면 뜨거운 물에 천을 담그는데, 그 과정에서 왁스는 녹아서 없어지고 색만 남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완성된 바틱은 양면으로 전부 그림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보니 전통적으로 일일히 손으로 그려서 만든 바틱은 비싸고, 요즘에는 스탬프나 프린팅을 통해 저렴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했다.
직접 만든 제품을 보자 입이 떡떡 벌어졌다.
"원하면 살 수도 있어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할게요."
바틱의 제작과정과 예술성에 대해서 설명을 마친 아저씨는 은근슬쩍 구입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친구와 함께 인사를 드리고 서둘러나왔지만, 가격만 비싸지 않다면 솔직히 작은 것 하나 정도는 기념품으로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듯 나오긴 했지만, 바틱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나는 근처에 있던 바틱 전문 숍에 들어갔다.
그 가게에에서는 바틱으로 만든 셔츠나 치마 등 일상생활에서 만든 옷을 판매하고 있었다.
"이거 한 번 입어봐도 되나요?"
바틱 자체가 굉장히 알록달록하고 화려하지만, 그나마 무난해보이는 바틱 롱스커트 하나를 골랐다.
어떻게 입는지 몰라서 버벅거리고 있으니 종업원이 와서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기성복처럼 허리 사이즈가 정해진 게 아니라 끈으로 묶는 시스템이라 내 넉넉한 뱃살과 허리 사이즈에도 문제없이 입을 수 있었다.
가격은 2-3만원 정도, 우리나라 물가 기준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었다.
살까? 말까?
고민이 되지만, 일단은 보류.
단기 여행이라면 그 자리에서 덥석 사고 또 환전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번 여행은 1달짜리.
이제 고작 사흘이 지났을 뿐이었다.
족자카르타에서 며칠 더 일정이 있으니 나중에 사도 늦지 않을 거 같았다.
결국 족자카르타를 떠나는 날에는 인도네시아 루피가 간당간당하게 남아서 구입하진 못했지만.
가게 입구에서는 아주머니 한 분이 바틱 천을 직접 만들고 계셨다.
너무 재밌고 신기해서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부탁하니 선뜻 그러라고 하시며 웃으셨다.
트랜스 족자 버스를 타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고작 몇 시간 돌아다녔을 뿐인데 다시 땀에 흠뻑 젖었다.
투어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서 에어컨을 18도로 맞추어놓고 샤워를 하고 나니 좀 개운해졌다.
동남아시아 여름여행에서는 에어컨 없는 숙소는 정말 상상조차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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