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늦게야 비가 그쳤어요.
그나마도 구름이 끼어서 언제 다시 비가 올 지도 몰랐어요.
호스텔에서 주는 아침을 먹은 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지만,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 조차 몰라서 호텔 바로 옆에 있는 가게에서 간단히 과자와 빵, 투버그 맥주를 사왔어요.
어차피 할 일도 없다면서 잠을 자고 있던 친구는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어요.
결국 밤 8시가 한참 지나서야 친구를 깨웠고, 같이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어요.
"혹시 이 근처에 식당이 있나요?"
"바로 옆에 Vanatur 라는 식당이 있어요. 아직 열었을 거예요."
하지만 호텔 리셉션 아주머니의 말과는 달리 식당에서는 우리를 가로막았어요.
아마 결혼식 때문에 누군가 그곳을 통째로 빌린 듯 했어요.
할 수 없이 나왔더 큰 길을 따라서 죽 내려갔어요.
여행은 고생만 하고 망치고, 배는 고프고, 가로등조차 제대로 없는 거리는 음침하기 그지 없었어요.
그러다가 불이 켜진 한 식당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아요.
이미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장사를 정리하는 듯 우리가 불쌍해보였는지 다행히 내쫓지는 않았어요.
메뉴판을 보고 케밥과 '포가차'라는 요리를 시켰어요.
처음에는 포가차가 안 된다고 했지만, 어떤 아저씨가 주문 받는 언니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자 곧 해주겠다고 했어요.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뜨니 다행히 날이 개어있었어요.
이미 전날 귬리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우리는 호텔에서 주는 조식도 안 먹고 바로 체크아웃을 했어요.
전날 날씨 때문에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던 귬리를 다시 돌아다녀보기로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거리는 귬리에서 나름 역사적인 거리였어요.
하지만 여기도 아직 지진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어요.
도로는 군데 군데 깨져있었고, 집들도 여전히 수리 중이었어요.
볼수록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가' 만 뼈저리게 느끼게 될 뿐이었어요.
그리고 왜 20여년이 넘도록 복구가 아직도 안 되고 있는지 이유를 직접 보게 되었어요.
2층짜리 큰 건물 수리를 할아버지 두 분이서 하고 계셨거든요.
아제르바이잔 바쿠를 돌아다닐 때에는 밤늦게까지 사람들 20-30명에 기계까지 동원해서 거리 정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건물 아래에 서 있는 할아버지가 양동이에 시멘트를 담으면, 건물 위쪽에 올라가 있는 할아버지가 양동이를 묶은 줄을 손으로 끌어올려서 붓고 있었어요.
이러니 진전이 될 리가 없죠.
길거리에서 말리고 있는 양털.
돌아다니다 보니 한쪽에서 전날은 보지 못했던 재래 시장이 열리고 있었어요.
귬리에서 본 게 없어서 그거라고 구경하기로 했어요.
아르메니아가 커피가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시장에서 커피콩을 파는 가게들이 종종 있었어요.
아르메니아 커피는 만드는 방식이나 맛이 터키 커피와 매우 비슷하다고 해요.
오디를 파는 아저씨.
터키나 인근 국가에서는 검은 빛이 도는 오디보다는 흰 오디를 훨씬 많이 먹는데, 여기에서는 검은 빛이 도는 오디를 팔고 있었어요.
씨알도 꽤 굵었어요.
다른 때 같았으면 사서 간식으로 먹으면서 다녔을 테니지만, 그냥 지나쳤어요.
친구는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는 것을 꽤 좋아해서 귬리를 그럭저럭 괜찮게 생각하는 듯 했지만, 제 머리 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어요.
'빨리 이 곳을 떠나서 예레반으로 가고 싶다'
도시 자체도 너무 삭막하고, 날씨 때문에 이런저런 고생을 한 데다가 시장 구경한답시고 돌아다니다가 차에 치여 썩어가고 있는 개의 사체까지 보고 바니 정말 밥맛이 뚝 떨어졌어요.
정말 이 쪽으로는 오줌조차 누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조금 더 시장 구경을 하고 싶어하는 듯한 친구를 재촉해서 버스를 타러 갔어요.
다행히 귬리에서 예레반으로 가는 미니 버스를 수시로 있었어요.
버스에 사람이 많으면 10-20분 정도만 기다리면 바로 새 버스가 도착했어요.
다행히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새 미니버스가 도착했고, 우리는 도망치듯이 귬리를 떠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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