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절해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다음날 새벽.
채 7시가 되지 않았는데 이미 밝은 환하게 밝아있었어요.
날도 선선한테 잠깐 새벽 산책이라 할까 생각했으나 조금 귀찮기도 하고, 이른시간부터 부스럭거리면 자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조용히 나왔어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 호스텔에서 주는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카프카스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 여유롭게 지냈던 날은 없는 것 같았어요.
제가 묵고 있던 엔보이 호스텔 Envoy Hostel 은 유료로 빨래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동안 밀린 빨래를 맡기려고 했어요.
"오늘은 빨래가 많아서 힘들어요. 근처에 빨래방이 하나 있으니 거기에 맡기세요."
알려준 대로 찾아가니까 무슨 병원 비슷한 곳 같았는데, 빨래방도 겸업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호스텔이나 근처 지역에서 꽤 영어가 잘 통하고, 외국인들이 많이 오가는 지역이라서 으레 영어가 통하겠지 싶었지만, 담당자 아주머니께서는 영어를 한 마디로 못했어요.
안되는 러시아어를 조합해가면서 간신히 맡겼는데, 내일 저녁 6시에나 준다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숙소 문제 때문에 다음날에는 예레반을 떠나있어야 했어요.
"우리 내일 그루지아로 떠나요."
거짓말로 사정사정을 했더니, 아주머니께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주셨어요.
저녁 8-9시 경에 호스텔로 보내주신다고 하셨어요.
호스텔에 대신 빨래를 받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우리는 관광을 하러 나갔어요.
"내가 어제 돌아다니다가 흐락파락 가는 지름길을 찾아냈어."
친구를 따라 갔더니 갑자기 번화가가 펼쳐졌어요.
Hyusisayin 거리.
새로 지어진 듯한 고층 건물들에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어요.
"여기가 예레반의 명동 같은 곳이야."
친구의 비유가 꽤나 그럴 듯 했어요.
예레반의 중심가인 공화국 광장하고 가깝기도 했고, 정말 느낌이 명동과 비슷했거든요.
그 때 이후로 우리는 이곳을 '명동'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거리 끝에는 오페라 극장이 보였어요.
공화국 광장.
그냥 넓은 분수라고만 생각했는데, 전날밤에 이곳에서 분수쇼가 있었다고 했어요.
혹시 오늘 밤에도 할지 모르니 저녁 때 같이 오자고 했어요.
근처에 우체국이 있어서 들어가서 우표를 사고, 서점에 들렸어요.
친구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좋아해서 아르메니아에서 사고 싶다고 했어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르메니아어판이 출판되었다는 정보를 찾았다는 했어요.
"그 책 예전에 출판되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이쪽에 보면 노천시장이 열리는데, 거기에서 옛날 책들도 팔아요.
아니면 Abobyan 거리의 뮤직홀 근처에도 한 번 가보세요."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친절하게 론니플래닛 예레반 지도에서 가리키면서 친절하게 알려주셨어요.
일단 노천 시장이 공화국 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서 지도를 보면서 찾아갔어요.
하지만 공터만 있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어요.
계속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식당 비슷한 곳이 하나 보여서 일단 들어가서 물어보았어요.
"여기는 맞는데, 시장은 일요일만 열려요."
오늘은 토요일.
아무 것도 없는 게 당연한 거였어요.
"그럼 뮤직홀은 어떻게 가요? 걸어갈 수 있나요?"
"멀어요. 저기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 되요."
지나가는 마슈르트카마다 세워서 일일이 물어보고 버스를 탔어요.
친절한 운전 기사님은 우리가 내릴 위치가 되지 뮤직홀을 가리키면서 내리라고 알려주었어요.
뮤직홀은 Yeritasardakan 지하철 역 근처에 있었어요.
지하에는 헌책들을 파는 헌책방들이 모여있었어요.
가판대나 조그만 키오스크 비슷한 헌책방이 몰려있는 가운데에서 그 중 가장 커보이는 한 서점에 들어갔어요
"연금술사 아르메니아어판 있나요?"
아저씨는 자신의 가게와 근처 가게를 전부 수소문하더니 책을 정말 구해줬어요.
원본은 아니고 불법 복제본인 것 같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어요.
저와 친구는 그 외에도 관심이 가는 책들을 이것저것 물어보고 뒤적거렸어요.
주인 아저씨께서는 다른 가게를 온통 뒤져서라도 이책 저책을 전부 꺼내서 보여주셨어요.
그 중에는 무려 러시아 제국 시절, 즉 19세기 후반에 나온 책도 있었어요.
전날 들렸던 큰 서점들보다는 작고 초라할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왠만한 큰 서점보다는 이곳이 훨씬 나은 것 같았어요.
저는 이곳에서 영어로 된 아르메니아어 교재를 한 권 구입했어요.
책을 사고 난 후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돌아오려고 했지만, 버스 정류장이 보이지 않아 계속 걸어오다 보니 숙소까지 걸어왔어요.
Surp Grigor Lusavorich 교회.
이 교회는 '조라바르 안드라닉 Zoravar Andranik' 역 근처에 있는데, 책을 사러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곳이예요.
아쉽게도 잠겨 있어서 안에는 들어가 볼 수 없었어요.
아마 예배 시간만 문을 열어주는 듯 해요.
이 교회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지 1700년을 기념해서 2001년에 지어진 교회예요.
아마 그와 관련해서 세워놓은 비석이 아닌가 해요.
지하철 역 이름의 주인공이기도 한 '조라바르 안드라닉 장군' 동상.
조라바르 안드라닉 지하철역과 그 건물.
"저거 좀 봐!"
친구가 놀라면서 그 근처에 있는 한 건물을 가리켰어요.
저 또한 보고 깜짝 놀랐어요.
거의 흉가와 다름 없는 수준의 소련식 아파트가 예레반 도심 한가운데에 남아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빨랫감이 잔뜩 걸려 있는 걸로 봐서는 아직까지도 사람이 살고 있는 건물이었어요.
어느덧 어둠이 잔뜩 내렸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다시 공화국 광장에 갔어요.
친구가 전날 공화국 광장에서 분수쇼를 보고 칭찬을 늘어놓았는데, 혹시 오늘도 하나 궁금했어요.
오늘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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