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몇 번이나 잠이 깨었다.
4명이 머무는 도미토리인데 한 명은 자정이 넘어서 체크인을 했고, 다른 한 명은 악몽을 꾸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다른 한 명은 부산국제영화제 자원봉사자인지 새벽 6시부터 부시럭거리니 제대로 잘 수가 없다.
도미토리는 원래 싼 맛에 불편함을 감수하는 거라지만, 참 안 좋은 조합에 걸렸나보다.
예전에 여행 다닐 때에는 10인, 16인실 도미토리에서도 지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지냈나 싶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30분 정도 뒹굴거렸지만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잠도 깰 겸 커피를 마시러 2층 라운지로 향했다.
뜨거운 물에 다시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말리고 시체처럼 침대에 누웠다.
네이버 날씨를 검색해보니 풍속 24m/s.
보퍼트의 풍력계급표에 따르면 17m/s가 넘으면 나뭇가지가 꺾이며 바람을 맞서 걸을 수가 없고, 24.5m/s 가 넘으면 큰 나무가 뿌리가 뽑힐 정도라고 한다.
내가 그냥 서있었던 거 자체가 기적이구나, 태풍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오전 10시 영화를 예매했던 친구에게 물어보니 도저히 보러 갈 상황이 아니라 아깝지만 취소를 했고, 오후 1시 영화도 볼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했다.
'서로 살아서 만나자'며 웃픈 인사를 나누었다.
인류 최후의 날처럼 안전 안내 문자는 계속 날라왔다.
밖에서는 우당탕하고 뭔가 부서지는 거 같은 소리가 계속 나고, 창틀도 비틀어서 물이 샌다.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도 난리가 아니다.
와이파이는 진작부터 먹통이고, 전기도 들어왔다 나갔다한다.
조지아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할 생각에 게스트하우스 조식을 안 챙겨먹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장님께서 태풍 때문에 정신이 없으셔서 조식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치우지 않으셨다.
늦게나마 토스트에 계란, 커피를 곁들여 식사를 했다.
이 정도 날씨라면 못 간 조지아 음식점 따위가 아니라 예매한 2시 영화를 볼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다행스럽게 12시 반을 넘어 오후 1시가 가까워지니 미친 듯이 불던 바람이 조금 잠잠해졌다.
태풍이 지나간건지 태풍의 눈 안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때 움직여야한다.
덜 마른 옷가지를 꿰어입고 후다닥 나섰는데, 게스트하우스 앞 골목길부터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시작에 불과했다.
엄훠나!
해운대 전통시을 거쳐 지하철역으로 가려는데, 입구부터 큰 간판이 떨어져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평소라면 진작부터 북적어야할 시간인데, 한산하다.
상인들도 이제서야 하나둘씩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날 밤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천막도 폭삭 주저앉았다.
구남로 버거킹 앞에도 큰 간판이 하나 뒹굴고 있다.
그나마 사람은 안 다친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우산 듀금
이미 회생불가능할 정도로 운명을 달리한 우산이 도로에 널부러져있다.
저 우산도 불쌍했지만, 우산 주인들에게 마구 동질감이 들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해운대역까지, 걸어서 10분 남짓 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참 파란만장했다.
나중에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들으니, 사장님 본인도 이 정도로 바람이 센 건 처음이라고 하셨다.
해운대가 바닷가라 그런지 유난히 피해가 심했는데, 근처 아파트들은 전체가 단전되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센텀시티역.
CGV 나 롯데시네마는 지하철역에서 백화점까지 바로 연결되어 있으니 건물로 들어가서 안 나오면 되지만, 내가 예매한 영화는 영화의 전당.
6번 출구로 나와서 10분 남짓 걸어가야한다.
영화의 전당이 보이자마자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그닥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건물 안에 몰려있는 것인지 예상보다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미래의 미라이'의 감독인 호소다 미라이 감독과의 오픈토크도 한창 진행 중이었다.
시네마운틴으로 향하는데, 분위기가 영 어수선하다.
태풍 피해가 생기면 바로 복구를 하기 위해서인지 카고 트레인도 서있고, 정체모를 포대 같은 것도 잔뜩 쌓여있다.
재작년에도 영화제 개막식 바로 전날 태풍이 와서 시설 무너지고, 게스트들 오니 못오니 한바탕 난리였는데, 올해는 시작하자마자 태풍이라니...
10월 태풍이 늘면서 부산국제영화제 주최 측도 고민이 많겠다 싶다.
영화 시작 40분 전, 드디어 시네마데크에 도착했다.
일찌감치 티켓팅을 했지만 10분 전부터 입장이 가능해, 소파에 앉아 영화제 일간지를 보거나 여행 기록을 남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미지 출처 : biff.kr
오늘의 첫 영화는 부탄 영화인 '붉은 남근 The Red Phallus' 이다.
이 영화를 고른 중요한 이유는 여기 부탄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부탄 Bhutan 이라는 나라가 워낙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나라라 영화 자체를 접하기 어려운 것도 물론 있지만, 2년전 부탄영화를 봤을 때의 기억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 더 컸다.
영화 자체도 그 나라를 닮아서 굉장히 신비러웠고, 영화 관계자분들과 GV시간에도 매우 성실하게 답변해주시고 마지막에는 관객에게 일일이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주는 팬서비스가 너무 좋았었다.
붉은 남근은 부탄의 한 시골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16살 소녀 상가이의 이야기이다.
상가이의 아버지는 불운을 막아준다는 목조 남근상을 제작하는 장인인데, 그녀는 그게 못마땅하다.
아버지는 나이가 들었지만 후계자가 없고, 그녀는 백정의 아들이라 천시받는 유부남을 몰래 만난다.
그는 '다 버리고 같이 팀푸(부탄의 수도)로 떠나자' 라고 재촉하지만, 상가이는 아버지를 혼자 둘 수 없다. 어머니가 남겨둔 직물을 다 짜야한다며 계속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웅장한 산악지대의 풍경과 우중충한 무채색과 붉은색의 조합은 신비로우면서도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에는 조용하고 소극적이던 상가이가 '여자는 이렇게 약해빠져서 안돼' 라면서 비난을 쏟아내고 강간까지 한 남자를 갑자기 폭발해서 그 남자를 때려죽이고 아버지의 작업장의 남근상을 다 때려부수는 장면이 나오는데, 갑작스러운 반전에 충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통쾌한 느낌도 들었다.
이 시간 대를 예매한 건 GV가 있어서였는데, GV는 아쉽게도 취소되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천재지변으로 인해 GV가 취소되었습니다' 했으면 그러려니 했을텐데, 영화 상영 전에는 할 거라고 공지했던 GV가 상영을 마치니 갑자기 취소되어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나중에 듣기로는, 이날 태풍이 부산을 관통한다는 소식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 주최 측에서 GV는 물론이거니와 이날 하루 영화 상영 전체를 취소하느니 마느니까지 말이 나왔다고 한다.
지인이 본 어느 영화는 아예 영화제 측에서 GV를 취소하겠다고 공지했는데, 감독님이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우겨서 GV를 진행했다고 한다.
1시간 30분 가량 컴컴한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날씨가 안 좋을까봐 조마조마했다.
주먹이 운다 (부들부들)
구름이 좀 끼긴 했지만, 하늘이 무려 파란색이다.
나는 왜 아침부터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가, 맑은 하늘이 이렇게 얄미워보기는 처음이다.
한 블록을 걸어서 센텀시티 신세계백화점 8층 CGV로 향했다.
인도영화를 통해서 알게 된 지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서로 바빠서 이렇게 부산국제영화제에 와야 겨우 얼굴을 보지만, 그래도 자주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
영화 시작 전에 이른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멀리 가기는 그렇고 신세계백화점 내에서 해결하려고 찾다가 9층 식당가에 있는 홍콩딤섬집인 '딤딤섬'으로 향했다.
샤오롱바오와 하가우, 오리구이 탕면까지 풀코스로 먹었다.
딤섬에 돼지고기와 새우, 게살이 들어가있고, 오리구이까지 먹었으니 한끼에 육해공을 전부 먹은 셈이다.
후식으로 폴바셋에서 밀크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
서로 오늘 아침에 있었던 파란만장한 태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집이 창원이라서 아침에 해운대로 시외버스를 타고 오려고 했으나, 태풍이 너무 심해 도저히 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창원은 부산보다 태풍이 일찍 지나간 터라 그쪽도 상황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1시에 예매한 영화는 놓치기 싫어서 정말 간신히 시간을 맞출 수 있었는데, 그 영화를 예정대로 GV가 있었다고 했다.
원래 영화제 주최 측에서 안전상의 이유로 GV를 취소하겠다고 통보했으나, 감독님이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 라고 우겨서 GV가 진행된거라고 한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한참 수다를 떨다가 둘 다 화장실을 갔다.
식사 후에 사실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아이스크림을 먹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3시간 반동안 화장실 못 가
같이 보기로 안 영화가 '산주 Sanju' 라는 인도영화인데, 런닝타임이 159분, 2시간 40분짜리 영화이다.
상영 후 GV까지 예정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3시간 반은 화장실을 갈 수가 없다.
인도영화는 보통 런닝타임이 2-3시간으로 길기 때문에 '인터미션 intermission' 이라고 해서 중간에 쉬는 시간을 주지만, 부산국제 영화제에서는 쉬는 시간을 안 주기 때문이다.
중간에 화장실을 가지 않도록 정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짰다.
영화 상영 시간에서 15분 정도 여유를 두고 입장하려고 했다.
"이 영화는 7시 30분 영화라서 지금은 입장 안 되세요."
카탈로그 북에서는 7시 영화로 되어 있었는데, 티켓을 자세히 보니 7시 반이라고 적혀있었다.
홈페이지에도 확인해보니 7시 반으로 되어있다.
자원봉사자분들께 물어보니 카탈로그북을 인쇄하고 난 이후에 스케줄이 바뀐 게 꽤 있어서 홈페이지를 참조하는 게 정확하다고 알려주었다.
뭐 이래...
30분 정도를 더 기다린 후 입장했다.
이번에 본 영화는 2018년 인도에서 가장 주목받은 영화 중 하나인 '산주 Sanju' 이다.
산주 Sanju 는 '산제이 더트 Sanjay Dutt' 라는 인도영화 배우의 애칭으로, 그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이미 사망한 인물을 일대기를 가지고 전기영화를 만드는 경우야 많지만, 실존하고 있는, 심지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단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그는 굉장히 논란이 많은 인물로, 사생활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마약중독을 경험하기도 하고, 1993년 뭄바이 폭탄테러와 연류되어있다는 의혹으로 오랜기간 재판과 실제 실형을 살기도 했다.
정말 영화만큼이나 스펙터클한 인생을 산 사람이라 영화는 긴 런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다.
산제이 더트의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은 '산제이 더트의 옛날 모습을 정말 리얼하게 연기했다' 라고 얘기했지만, 나는 산제이 더트의 영화를 거의 못 봐서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나에게는 주연인 란비르 카푸르 Ranbir Kapoor 의 연기력을 재평가하게 된 기회였다.
솔직히 이 영화는 추천받아 본 거라 배경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로 본 거였는데, '란비르 맞아?'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존과 다른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각인되어 있는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거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닌데, 자신의 기존 스타일과 상당히 다른 인물을 그것도 20대부터 50대까지 연기한다는 건 전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감독은 산제이 더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옐로저널리즘과 가짜 뉴스의 문제점을 같이 지적을 했지만, 단순한 추문도 아니고 마약과 불법무기소지와 같이 큰 문제에 너무 산제이 더트의 입장에서 옹호하려 했던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산주 Sanju 의 감독인 라즈쿠마르 히라니 Rajkumar Hirani 감독과의 GV 시간이 있었다.
인도영화 중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세 얼간이 3 Idiot'의 감독이기도 하다.
인도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팬 층이 꽤 있는 편이고, 또 인도의 유명감독이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질문이 이어졌다
감독님은 산제이 더트에게서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25일동안 듣고 난 후,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한 사람의 몇십 년의 인생을 2시간짜리 영화로 만들다보니 어느 정도 각색 혹은 연출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심지어 산제이가 베스트프렌드의 연인과 잠자리를 함께 한 것조차 실화라고 덧붙였다.
란비르 카푸르를 주연 역할을 맡게된 이유는 산제이 더트가 수닐 더트와 Sunil Dutt 와 나르기스 더트 Nargis Dutt 라는 배우 출신 부모를 둔 가정에서 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란비르 카푸르 또한 부모님이 두분 다 유명 배우이기에 유사한 환경에서 역할에 좀 더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 산제이 더트와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 먼저 웨이트로 20kg을 증량해서 1달간 촬영한 후 다시 2달간 감량해서 촬영하기도 하고, 노년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촬영 4시간 전부터 가발을 2겹씩 쓰고 분장하는 등 노력을 많이 했다고 했다.
거의 1시간 가량의 GV시간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관객들과의 포토 타임이 있었다.
감독님이 객석으로 들어가서 사진 촬영을 했는데, 열심히 손을 흔들었지만 내 뒷좌석에 앉았다.
사진 촬영을 마치자마자 자원봉사자들과 관계자들은 열심히 감독님을 다른 통로로 빼돌렸다.
상영관 이용시간의 제한이 있으니 안 되더라도 밖에서는 사인을 받는다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는 경우는 감독남만 괜찮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주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감독님이 사인해주겠다고 했는데도 아예 다른 통로로 해서 안내해서 만날 기회 자체를 차단해버렸다.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들에게 항의하기도 했지만, 그 사람들이라고 무슨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다들 아쉽다며 발길을 돌렸는데, 같이 간 친구는 그 와중에 미리 준비해간 '세 얼간이' DVD에 사인을 받은 성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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