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화는 오전 11시에 해운대 메가박스에서 시작한다.
숙소랑 가깝고 상영시간이 늦어서 늦잠을 잘 수 있었다.
오늘의 첫 영화는 태국 영화 '방랑 Wandering' 이다.
태국 영화는 주로 공포영화가 많아 알려져 있지만, 영화 산업도 발달해있고 위라세타쿤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감독도 많다.
'방랑' 이라는 영화는 아들도 죽고, 아내도 떠나고 폐인이 된 남자가 우연히 한 스님을 만나 불가에 귀의하게 되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술 마시고 도둑질을 하면서 습관을 버리지 못해 거짓말을 하고 돈을 받아 술을 마시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마음을 다잡고 결국 승려가 되기로 결심한다.
아들의 무덤을 찾아 '너를 위해 스님이 되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예전에 태국 불교에 관해 읽었던 내용이 순간 떠올랐다.
태국 불교에서는 승려가 되는 것이 가장 큰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한다.
누군가 승려가 되면 본인 뿐만 아니라 부모나 자손 등 주변 사람들에게도 공덕이 간다고 하는데, 종교든 사상이든 결국 가장 기본적인 부모자식간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마지막에 가파른 돌산을 기어올라서 꼭대기에서 햇빛을 받으며 명상을 하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마치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을 보는 기분이었다.
태국은 불교의 나라이구나 하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참 태국스럽다고 느껴졌다.
다른 상영시간대에는 감독님과의 GV 시간이 있었는데, GV를 가도 좋았을 거 같다.
점심은 근처에 있는 고래사어묵 해운대에서 먹기로 했다.
숙소에서 해운대 지하철역으로 가려면 반드시 그 앞을 지나가야하는데, 벽에 커다란 어묵모형이 붙어있어서 늘 눈길을 끌었던 곳이었다.
어묵집이라고 하면 튀김냄새와 약간 비릿한 생선냄새가 날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카페처럼 깔끔했다.
무엇보다 어묵의 종류가 정말 다양했다.
깻잎을 넣은 것, 고추를 다져 넣은 것, 문어조각을 넣은 것, 치즈를 넣은 것, 심지어 전복을 넣은 것도 있었다.
어묵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한지 처음 알았다.
통깻잎말이 어묵을 하나 골랐다.
어묵 안에 당면과 아채가 들어있었고, 고추도 좀 다져넣었는지 매콤한 맛도 있었다.
매장에서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과 전자렌지도 갖춰져 있었다.
고래사어묵의 대표메뉴인 어우동도 주문했다.
여러 종류의 어묵 조각과 함께 여묵으로 만든 면과 유부 주머니 하나가 들어있는데, 어묵면이 불거나 풀어지지 않고 탱탱한 식감을 가지고 있는게 너무 신기했다.
우동과 오뎅의 중간 같은 느낌?
왠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팔면 잘 팔릴 거 같다.
참고 : 부산 해운대 맛집 - 고래사어묵
나머지 영화를 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센텀시티로 왔다.
다음 영화 시작은 오후 4시.
원래는 해운대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바로 남포역으로 가서 영도대교 도개를 보고 올 계획이었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일정이 길어지니 종종걸음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좀 지쳤나보다.
적당히 영화의 전당과 APEC 나루공원이나 산책하기로 했다.
비프힐 BIFF Hill 안에는 영화 '다이빙벨' 상영 금지 조차에 대한 영화인들에 반대시위가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고보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참 파란만장했다.
영화제가 열리니마니 하다가 어찌어찌 열렸는데 바로 개장을 앞두고 태풍피해까지.
그래서 그런지 영화제의 분위기도 작년만 못하다.
관람객도 적고, 영화도 명성있는 작품들보다는 신인감독들의 작품으로 채워진 경향이 많았다.
적당히 둘러보고 APEC 나루 공원으로 향했다.
아직 시월초라 햇볕이 따가웠다.
평일 낮이라 사람도 많지 않고, 딱 산책하기 좋은 도심 공원이었다.
한쪽으로는 강물이 잔잔하게 흐르면서도 바로 앞에는 최첨단 도시를 연상케하는 마린시티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과장 조금 보태면 뉴욕의 센트럴파크보다도 나을 거 같다.
오늘 볼 두번째 영화는 '자비의 여신 Honeygiver : Among the Dogs' 라는 부탄영화다.
평생 한 편 보기도 힘든 부탄영화를 이번 영화제에서 두 편이나 보게 되었다.
이 영화의 배경은 부탄에서도 외진 산골마을이다.
한 경찰이 실종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마을을 찾았는데, 용의자는 마을 외곽에 혼자 살고 있는 '마녀'는 젊은 여자다.
경찰은 여행객인양 위장해서 그녀를 추적하는데, 며칠간 산 속을 같이 다니게 된다.
자비의 여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뗄 수 없는 영화였다.
부탄의 울창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매혹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지닌 여자를 따라가고 있노라면 마치 숲 속의 요정이나 구미호에게 홀리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탄 이라는 나라의 이미지가 '마지막 남은 샹그릴라'' 은자의 나라' 여서 더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깊고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고서 '꼭 부탄에 다녀오리라' 라느 마음이 굳어졌다.
영화 두 편을 보고 나니, 어느새 밤이다.
마지막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오늘의 마지막 영화이자 부산국제영화제의 총 마지막 영화는 '밝음 Brightness(Yeelen)' 이라는 말리영화이다.
무려 1987년에 제작된 영화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처음 소개된 블랙아프리카 영화이자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 1001편'중의 한 편으로 선정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감독이신 술레이만 시세 Souleymane Cisse 감독님은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계의 거장 감독으로도 손꼽히는 분이신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을 맡아주시기도 했다.
30년 전 영화다보니 화질도 그닥 좋지 않고, 영화 화면 자체도 좁아서 정말 옛날 느낌 영화 느낌이 났다.
밝음의 배경은 말리의 고대 밤바라 문화이다.
흑마법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아난코로는 어머니와 삼촌의 도움으로 마법의 힘을 얻기 위한 여정에 오르는데, 심술궂은 아버지는 그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결국 마지막에 아들과 아버지는 목숨을 건 대결을 하게 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무리 명작이라고 하지만 상당히 난해하고 어려웠다.
첫 장면부터 살아있는 닭을 산채로 불태워죽이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나무통나무가 막 날아다니거나 하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기괴스럽기도 했고, 판타지스럽기도 했다.
넓은 사막에 흰 구슬 하나만 덩그러니 남겨진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굉장히 독특하고, 신비로우면서도 인상에 많이 남는 영화이기는 했다.
이 영화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최소한 3번을 더 봐야할 거 같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GV 시간이 있었다.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분이라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이 대부분 GV 에 참석했다.
술레이만 시세 감독님은 말리 전통 의상을 입고 오셨는데, 영화 시작전부터 뒷모습을 보고 '저 분이 혹시 감독님이 아니신가?' 싶었는데, 내 예상이 맞았다.
GV 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다.
이것저것 질문하는 사람들이 참 많는데,감독님께서는 친절하고, 때로는 유머를 섞어가면서 답변해주셨다.
혹시 말리에 다녀온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셨는데, 아쉽게도 한 명도 없었다.
말리 가보고 싶다.
술레이만 시세 감독님께 사인도 받았다.
이런 세계적인 감독을 내가 어디 가서 다시 만나랴.
부산국제영화제는 이 맛에 온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늦은 저녁으로 돼지국밥을 먹었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혼자 식사를 할 수 있는데가 많지 않은데 시간도 늦어서 고민했는데, 해운대 쪽에 24시간 하는 국밥집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숙소에 돌아오니 어느새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다.
내일은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라, 씻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프로그램북도 1주일간 땀 묻고, 손때 타고, 먼지를 뒤집어써서 흐늘흐늘하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 티켓들.
10월 7일부터 12일까지 총 15편의 영화를 보았다.
하루 평균 2.5편을 본 셈인데, 많이 본 건 아니지만 나름 만족스러웠다.
매일매일 영화 4편씩 꼬박꼬박 챙겨보시는 분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거 같다.
그런데 오늘도 직원이 없네
내일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해야해서 열쇠를 어떻게 줄건지 물어봐야하는데, 직원이 여전히 안 보인다.
여기는 직원이 무슨 우렁각시를 보는 기분이다.
아몰랑, 그냥 적당히 놓고가면 되겠지.
4인용 도미토리를 예약했는데, 이틀 남짓 빼놓고는 계속 독실처럼 쓰고 있으니, 나로서는 어쨌거나 이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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