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곳은 에스키 샤하르(올드타운) 안에 있는 모스크 몇 개와 노르부타벡 마드라사 주변에 있는 유적지 몇 개.
에스키 샤하르는 버스 터미널과 가깝기 때문에 일단 노르부타베이 마드라사 쪽으로 향했어요,
함자 이름의 우즈벡 국립극장 (Hamza nomidagi o'zbek davlat musiqali drama teatri).
입구의 부조가 인상적이었어요.
드디어 도착한 노르부타벡 마드라사(Norbutabek madrasasi).
주메 모스크에서 그닥 멀지는 않지만 처음 가보는 길이라 거리 개념이 없어 멀게 느껴졌어요.
"안녕하세요. 어디에서 왔어요?"
우리를 보자 인상 좋게 생긴 우즈벡 할아버지가 영어로 말을 걸었어요.
우즈벡어로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매우 좋아하셨어요.
그닥 영어를 잘 하시진 못했거든요.
할아버지는 마드라사에서 일하시고 계시는데, 외국에서 관광객들이 오면 구경도 시켜주고, 설명도 해준다고 했어요.
마드라사 뿐만이라 근처에 유적 몇 개가 모여있는데, 우리에게도 보여주시겠다면서 안으로 안내했어요.
노르부타벡 마드라사는 1799년에 지어졌는데, 현재는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다고 했어요.
내부에는 옛날 학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했을 조그만 방들이 즐비해있었어요.
" 마을로 들어가는 것보다 이 길로 가는게 편해."
할아버지는 마드라사 뒤로 우리를 데려가더니 자물쇠로 잠겨있는 파란 철문을 열어줬어요.
헉! 정말 바로 보이네.
이런 지름길이 숨겨져 있었다니.
우리는 할아버지 뒤를 따라 누군가의 것일지 모르는 무덤 앞을 지나갔어요.
이 유적은 '다흐마이 쇼혼 무덤(Daxmai shohon maqbarasi'예요.
예전 코칸드 칸국 시대 때 이 지역을 다스린 어느 칸(왕)의 어머니 무덤이라고 해요.
여기에도 화려하게 채색한 천장.
마치 우리나라 절의 단청과 비슷한 것 같아요.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여류시인, '노디라 Nodira'의 무덤이자 기념비예요.
이 분이 바로 노디라..
이 우표는 우즈베키스탄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첫 해인 1992년에 발행한 최초 우표인데, 그 모델이 바로 '노디라' 예요.
'노디라'는 1792년 안디잔 지역의 통치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842년 코콘(코칸드)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이 무덤은 '노디라'를 기념하여 1967년 5월 25일에 만들어졌다고 해요.
"설명비는 한 사람당 5천숨씩, 만 숨이예요."
우리는 기꺼이 돈을 드렸어요.
어차피 할아버지가 영어로 말을 걸어오고 설명을 해줄 때부터 수고비를 받을거라고 눈치를 챘거든요.
시간이 부족한 우리로서는 헤맬 필요도 없이 유적지 몇 개를 설명을 들어가며 한꺼번에 볼 수 있었으니 그닥 손해도 아니었어요.
5천숨이면 2달러 밖에 안 하는데요.
할아버지와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어요.
"우리 이제 어디어디 남았지?"
"다시 주메 모스크 근처로 돌아가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야해.
그 안에 있는 모스크 3개만 보면 끝이야."
드디어 고지가 보이는구나!!!
우리는 발걸음을 서둘렀어요.
찾았다!!!
에스키 샤하르는 보통 사람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얼기설기 엉킨 골목들이 많아서 길을 찾아가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닥 어렵지 않았어요.
론니플래닛 지도도 꽤 정확한 편이었고, 골목마다 이름표가 다 붙어있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가 쉽게 파악이 되었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친절하게 알려주었고요.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진바르도르 마스지드 '.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사실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보는 게 정확해요.
우즈베키스탄 여행 때 주의할 점 중 하나는 모스크나 마드라사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된다는 점이예요.
특히 여자라면 더더욱요.
보통 모스크 같은 공공적인 종교장소는 남성들의 사교장소의 기능도 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은 들어갈 수 없어요.
일반적으로 우즈벡 여성들은 모스크에 가지않고 집에서 개인적으로 기도를 드려요.
여성이 들어가면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불편, 심지어는 불쾌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되도록이면 박물관이 아닌 모스크나 마드라사에 들어가지 않아요.
내부에 사람이 없거나 관계자가 허락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들어가 볼 뿐이예요.
그 다음 찾아간 곳은 사힙조다 하즈라트 마드라사(Sahibzoda Hazrat Madrasasi).
1850~60년 무렵에 지어진 마드라사라고 해요.
여기 역시 밖에서만 슬쩍 보고 가려고 하니 아쉬워서, 안은 어떤가하고 문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어보니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곳이 아니라 공사중이었어요.
안에서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우리를 보더니 들어와서 구경하라고 했어요.
내부는 이렇게 공사 중.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수리를 하고 있는 모스크나 마스라사들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소련 통치기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여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억압했어요.
특히 이슬람을 많은 박해를 받아서 수많은 모스크와 마드라사들이 문을 닫고, 종교지도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내졌지요.
독립 이후 종교를 다시 부흥시키면서 폐허가 된 모스크나 마드라사를 다시 짓거나 수리하고 있는 곳이 많아요.
돌아다니다 보니 건물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된 계단이 있기 때문에 올라가봤어요.
계단에도 온갖 쓰레기며 공사 자재들이 쌓여있어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서 올라갔어요.
위층에서 본 풍경.
드디어 마지막 하나! 호지벡 마드라사(Hojibek Madrasasi)만 남았어요.
에스키샤하르에서 본 두 개의 모스크는 길만 잘 찾아서 쭉 따라가면 되니 찾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하지만 호지벡 마드라사는 몇 번 골목을 꺾어들어가야해서 찾기가 어려운 편이었어요.
"헬로우!"
"니하오!"
"곤니치와!"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은 우리를 보자 자기들이 아는 온갖 외국어로 인사를 했어요.
보통 어린애들에게는 가벼운 인사 정도만 하고 그냥 지나치는 편이예요.
인사를 받아주고 온동네 친구들을 다 불러서 졸졸 따라오면서 사진 찍어 달라, 어디에서 왔느냐 등 온갖 말을 다 걸면서 귀찮게 하거든요.
게다가 한 놈도 아니고 이놈저놈 앞집애 뒷집애 옆집애 이웃집애 다 말을 걸어오면 정신이 쏙빠지기 일쑤예요.
하지만 시간도 없고, 아이들은 귀찮게 할 지언정 나쁜 의도로 접근하지는 않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마드라사의 위치를 물어보기로 했어요.
"너희들 호지벡 마드라사 알아?"
"호지벡이요? 알아요! 따라오세요."
졸지에 낯선 외국인 둘이 열 명 남짓되는 어린애들을 이끌고 마을 골목을 점령한 꼴이 되었어요.
아이들은 서로 키득거리고 웃고, 떠들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는 석류 하나를 가지고 뜯어먹고 있고...
"여기예요."
아이들을 따라오니 그닥 오래 걷지 않아 도착했어요.
평상에 앉아계시던 마을 어른 한 분이 아이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줄 아셨는지 전부 쫓아내셨어요.
애들아, 미안. 과자라도 한 봉지 들려서 보냈어야하는건데...
마을 분의 도움으로 마드라사 안에 들어갔어요.
호지벡 마드라사는 현재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었어요.
외국에서 온 관광객이라고 하자 집주인 할아버지께서는 흔쾌히 우리를 맞아주셨어요.
"여기가 바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야."
자물쇠를 열자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이게 무슨 귀신집이야.
폐허도 이런 폐허가 없었어요.
천장은 뻥 뚫려있고, 바닥은 온통 먼지 투성이에 낡아서 썩어버린 나무 조각이 뒹굴고 있었어요.
비주얼은 흉가로 유명한 제천 늘봄가든 부럽지 않았어요.
"여기는 코콘(코칸드)에서 제일 오래된 마드라사인데,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이렇게 방치되고 있어.
우즈베키스탄이 독립되고 난 이후 여기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이니 수리 좀 해달라고 타슈켄트에 여러반 찾아가서 그렇게 부탁했었는데,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이 모양이야.
너희들이 보는 그 책(론니플래닛)을 보고 종종 관광객들이 찾아오는데, 보여주기 부끄러울 지경이야."
많은 여행객들이 흔히 사마르칸드나 부하라, 히바에서 보는 유적들은 정말 국가에서 신경써서 보수하고 관리하는 곳이었어요.
버려져서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고, 관심도 받지 못하는 곳의 모습은 이렇구나...
소련 시대 때 폐허로 남겨졌을 많은 모스크나 마드라사의 모습을 보는 듯 했어요.
뒷맛이 참 씁쓸했어요.
"차 한 잔 마시고 가요. 차 준비해놨어."
"죄송해요. 저희 오늘 저녁에 파르고나(페르가나) 넘어가요."
할아버지도 아쉬워하셨고, 우리도 아쉬웠어요.
하지만 파르고나 가는 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이거라도 가지고 가요."
할아버지는 마당에서 자라는 석류나무에서 석류를 두 알 따서 주셨어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서둘러 버스 터미널로 향했어요.
골목에는 슬슬 땅거미가 지고 있었어요.
신나게 놀던 아이들도 하나둘 집에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오후 5시 58분.
파르고나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서 있었어요.
"파르고나 가요?"
"가. 빨리 타!"
표를 받는 직원이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곧 이해할 수 있었어요.
6시 반인줄 알고 있던 파르고나행 막차가 사실은 6시였던 것이었어요.
이런 론니 XX! 일정 첫날부터 말아먹을 뻔 했잖아!!!!!
중앙아시아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론니 플래닛을 믿을 수가 없어요.
원래부터 론니플래닛을 그닥 믿는 건 아니었지만, 특히 중앙아시아 편은 정말 욕이 에미넴 랩처럼 나와요.
우리는 다행히 막차 출발 직전에 잡아탄 것.
다른 시간 대에는 텅텅 비어서 다니던 버스가 막차라서 그런지 사람이 만석이었어요.
우리는 간신히 남는 두 자리를 비집고 앉았어요.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가 내렸던 '양기 바자르'에 정차했어요.
시장도 거의 문을 닫을 시간이라서 장을 보고 나오는 사람이며, 하루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로 버스는 발디딜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찼어요.
사람이든 짐이든 더 태울 공간이 없어보이는데도 버스는 출발하지 않고 차장은 계속 호객행위를 해댔어요.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돈을 더 주고서라도 쉐어드 택시를 타겠다고 내리기도 했어요.
왜 출발을 하지 않느냐고 승객들이 짜증을 내며 항의를 하자 6시 반이 지나서야 버스는 간신히 출발을 했어요.
어느새 짙게 내리는 어둠.
코콘(코칸드)에서 파르고나(페르가나)까지 가는 버스는 직행이 아니라 중간중간 사람을 태우기도 하고, 내리기도 해요.
물론 구간에 따라서 요금도 다 다르고요.
코콘에서 파르고나까지 요금은 한사람당 4000숨(약 1.5달러)이고, 2시간 정도 걸려요.
밖이 어두운데다가 보이는 건 들판, 나무, 풀 밖에 없는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자기가 내릴 곳을 알아서 잘 찾아내렸어요.
8시 반 정도 파르고나 버스 터미널 도착.
터미널을 제외하고 거리는 온통 깜깜했어요.
낮에 오쉬 한 그릇을 먹은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못 먹었기 때문에 샤슬릭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문을 연 식당도 하나도 없었어요.
파르고나(페르가나)는 파르고나 주(州)의 중심도시인데, 어느 시골마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어요.
밥은 포기하더라도 일단 숙소부터 찾자!!
론니플래닛에 나온 지도를 바탕으로 저렴한 호스텔들을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저는 방향감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도로 이름들을 확인한 후 지도와 대조해가면서 길을 찾아가요.
하지만 아무리 찾아가도 표지판도 없고, 가로등 하나 없어서 론니플래닛을 볼 수도 없었어요.
한참을 걸었다가 다시 버스터미널로 돌아갔다가, 다시 다른 길로 한참을 걸었다가 돌아갔다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는 둘째치고서라도 내린 곳에서 엎어지면 바로 코닿을 거리에 호텔이 하나 있어야하는데 그 호텔이 어디있는지조차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혹시 저건가?"
터미널 근처에 높은 건물이 하나 있기는 한데, 호텔이라면 당연히 있어야하는 간판이 보이지 않아서 긴가민가했어요.
근처에 서 있는데 한 아저씨를 잡고 물어보았어요.
"지요라트 호텔 어디있는지 아시나요?"
"바로 저건데, 지금 공사 중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아저씨는 같이 확인을 해보자며 안으로 들어갔어요.
지요라트 호텔은 아직 공사 중이었지만, 일부 객실은 운영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객실 자체도 적을 뿐더러 남는 방은 한 사람당 60달러씩, 120달러.
예상했던 최대 금액의 2배가 넘는 돈이었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한 달에 100달러도 채 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돈을 단지 하루밤 자는데 써버리기에는 너무 비싸고 아까웠어요.
더군다나 여행 첫날부터요.
아저씨는 다른 호텔들도 소개시켜주었지만, 하루밤에 100달러가 넘는 고급호텔 밖에 없었어요.
"혹시 아시는 분 중에 우리 하루밤 재워줄 사람 없나요? 한 사람당 20달러씩 드릴게요."
다행인 점은 우리는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거주지 등록 문제가 없어요.
일반 여행자였다면 거주지 등록을 받기 위해서라도 호텔에 들어갔을 거예요.
우즈베키스탄에서 거주지 등록을 하지 않은게 경찰에게 잡히면 3000달러의 벌금을 물거든요.
아저씨는 여러 사람에게 전화를 했지만, 아마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 같았어요.
"우리 집에서 하루 밤 자고 갈래요?"
"감사합니다. 폐 끼쳐서 죄송해요."
이건 정말 최후의 선택.
누구인지도 모르는 낯선 외국인이 하루밤 재워달란다고 해서 재워주기도 쉽지 않은 선택인데, 아저씨에게 정말 죄송하면서도 감사했어요.
아저씨의 집은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단독주택이었어요.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에 아저씨의 가족들은 창고로 쓰던 손님방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방이 정리되자 아저씨께서는 차와 물 한 병을 주시고, 쉬라고 하셨어요.
손님방은 문이 제대로 잘 닫히지가 않아서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는 통에 쌀쌀한 편이었어요.
하지만 일단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다는 사실에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했어요.
파르고나(페르가나) 숙소 정보는 아래 포스팅을 참조하세요.
http://hititler.tistory.com/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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