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났더니 비가 그쳤다.
어느덧 저녁 7시.
아... 나가기 싫다...
피곤하고 졸려서 나가기가 영 귀찮았다.
계속 침대에만 뒹굴고 싶었다.
하지만 저녁은 먹어야하고, 호텔 근처에 음식점이나 편의점 같은 건 안 보이고...
밥을 먹기 위해 꾸물꾸물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뭘로 배를 채워야하나
뭘 먹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어딜 가야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지도 몰랐다.
저녁이라 슬슬 어두워지니, 안전을 위해 좀 밝고 사람이 많아보이는 골목 쪽으로 그냥 걸어갔다.
이 거리의 이름은 놀랍게도 Lebuh Armenian, 아르메니안 스트리트였다.
저 멀리 카프카스에 위치한 아르메니아가 이 멀디 먼 말레이시아와 무슨 연관이 있나 싶었다.
원래 여기는 말레이인들이 살던 지역 중 하나였는데 19세기 초 성 조지 교회 St. George Church 의 건축을 위해 아르메니아 무역상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오래 여기에 머무르진 않았고, 20세기 초에는 대부분 떠났다고 한다.
아르메니안 거리라는 현재의 이름은 아르메니아 라는 국가가 세워지고 난 이후에 붙여진 거라고.
현재는 거리에 달린 홍등이라던가 화려한 처마의 사당등에서 알 수 있다시피 중국계들이 많이 거주한다고 한다.
좁은 아르메니안 거리 골목을 벗어나서 조금 걸었더니 이번엔 모스크가 나타났다.
카피탄 켈링 모스크 Kapitan Keling Mosque 는 페낭 조지타운의 가장 대표적이자 큰 모스크 중 하나로, 19세기 초 동인도회사의 군대를 통해 들어온 인도 무슬림들을 위해 건설된 모스크라고 한다.
입구가 열려있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 가능하며, 입장료는 무료다.
넓은 정원에는 미나렛 Minaret 이 하나 서있다.
터키나 중동 지역에서 본 모스크에서는 미나렛이 바로 모스크 건물 옆 혹은 근처에 붙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서는 덩그러니 미나렛 하나만 서있어서 탑이나 다른 조형물 같은 느낌이다.
사람들이 선풍기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앉아있다.
모스크는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의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예 들어갈 생각조차 안 했는데, 낮 시간 대에는 대여해주는 히잡을 쓰고 입장이 가능한 모양이다.
이슬람에서는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이나 기도하기 전에 '우두' 라고 해서 얼굴과 손발을 씻어야하기 때문에 씻는 장소가 꼭 있다.
보통은 수도를 만들어놓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게 목욕탕처럼 해놓은 건 처음 봤다.
뒤쪽에는 여성들의 기도실이 있다.
내가 모스크를 싫어하는 이유다.
모스크의 건축양식은 다 비슷비슷한데, 키블라 Qibla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 같이 볼만한 것들은 거의 남성들의 공간에서만 볼 수 있다.
여성들의 공간은 무슨 개평 주듯이 뒤편 혹은 아예 다른 방이나 층에 있는 경우가 많다.
들어가서 벽만 멍하니 보고 있다보면 '내가 무슬림도 아니고, 여기서 벽을 왜 보고 있어야하나.' 라는 허망함과 자괴감이 드는 것이다.
아잔 Adhan (이슬람교에서 신도들에게 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 이 울렸다.
기도시간에는 이방인은 자리를 비켜주는 게 예의인지라 조용히 모스크를 빠져나왔다.
돌아다니다보니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긴 했는데, 다시 처음의 문제 '저녁을 어디서 먹지?' 에 마주하게 되었다.
3-4분 남짓 사람들을 따라 걷다보니 눈 앞에 먹거리 노점들이 쭉 펼쳐졌다.
모스크 다녀왔다고 알라신이 도우셨나보다.
록록 Lok Lok 부터 완탕미 Wantan Mee, 사테 Satay, 굴전 Oyster Omelette 등 종류도 다양해서 골라먹을 수도 있었다.
정말 발길이 닫는 대로 갔던 터라 당시에는 위치도 몰랐고,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엄청 기뻤다.
나중에 알고보니 출리아 거리 야시장으로, 밤이 되면 호커 hawker 라고 하는 노점맛집들이 문을 연다고 한다.
먹을 수 있을까? 에서 뭘 먹지? 라는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쭉 훑어보다가 고른 곳은 '호키엔 미 Hokkien Mee' 노점이었다.
호키엔 Hokkien 은 한자로 복건 福建 이라고 쓰는데, 중국 남부 해안지역에 있는 '복건성(푸젠성)' 을 의미한다.
중국 복건성 남부 쪽에서 이주한 이민자들을 가리키는데, 말레이시아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널리 분포해서 살고 있다고 한다.
미 Mee 는 면 麵, 즉 국수를 의미하니, 호키엔 스타일의 국수 요리라는 뜻이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니 음식을 만들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메뉴판을 건네주셨다.
메뉴는 호키엔미 딱 하나로, 작은 게 5링깃(약 1500원), 큰 게 6링깃 (약 1700원) 이다
토핑으로 구운 돼지고기나 폭립, 돼지내장을 추가할 수 있었다.
주문을 하니, 할아버지께서 바로 앞에 있는 테이블에 앉으라고 하셨다.
호키엔 미
내가 주문한 건 호키엔미 스몰 사이즈에 구운 돼지고기 토핑을 추가한 것이다.
가격은 8링깃 (약 2,300원). 정말 눈물나게 저렴한 가격이다.
붉고 기름기 있는 국물 안에는 면이 들어있고, 한 입거리로 잘라놓은 훈제 삼겹살과 양파부스러기 튀김, 계란 반쪽이 올려져있다.
숟가락 안에 든 것은 양념장으로, 국물에 풀어 먹으라고 하셨다.
혹시 매울까 싶어서 살짝 맛을 봤는데 안 매워서 다 풀었다.
참고로 호키엔미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널리 먹는 음식이지만, 지역마다 스타일이 조금 다르다고 한다.
크게 싱가포르와 쿠알라룸푸르, 페낭 스타일로 나뉘는데, 싱가포르식와 쿠알라룸푸르식은 볶음면에 가깝지만 페낭만 이렇게 국물국수 스타일로 먹는다고 한다.
면은 노란빛이 돌고 굵기가 좀 있는 에그 누들과 쌀국수면처럼 얇은 면, 이렇게 2가지 종류의 면이 들어있었다.
굵은 면은 도톰하니 씹는 맛이 있고, 얇은 면을 호로록 빨아들이는 맛이 있다보니 2가지 면의 조화가 참 재미있었다.
시원하다
깔끔하거나 담백한 음식도 아니고, 20도가 넘는 더운 날씨에 뜨거운 국수요리를 먹는데도 이상하게 시원했다.
국물은 각종 향신료와 커리를 배합한 거 같은데, 이런 강한 향신료를 먹으면 처음에는 몸에서 열이 훅훅 오른다.
그러다가 땀이 살짝 나고 그 열기가 식으면 묘하게 개운하고 시원함이 느껴지는게, 그래서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렇게 자극적이고 강한 음식을 먹는구나 싶다.
처음 커리 락사를 먹었을 때 내가 빠져들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다보니 10분도 채 안 되어 한 그릇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배가 차니 마음의 여유가 찾아왔다.
숙소 방향으로 가는 길에 발견한 생과일 주스 노점.
잘 먹었으니 시원한 걸 마시면서 입가심하기로 했다.
조그만 노점 매대에는 신선한 과일과 야채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데, 주문을 하면 과일을 손질한 후 얼음과 같이 즉석에서 갈아준다.
망고 주스
내가 주문한 건 망고 주스로, 가격은 2.7링깃(약 800원) 이다.
끈이 달린 비닐봉지에 넣어주고 빨대를 꽂아주었다.
우리나라도 비닐 사용량이 많다고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사용량은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다.
태국 여행을 다닐 때 꼭 알아야한다는 필수 단어 중 '싸이퉁' 이라는 말이 있는데, 포장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면 반찬부터 뜨거운 국수요리까지 거의 대부분의 음식들과 과일, 음료수까지 이런 비닐봉지에 포장해주었다.
외식이 많고, 노점상이 많다보니 식기구의 위생상태를 믿을 수가 없어서, 현지인들도 이런 일회용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걸 더 깨끗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1회용품 사용을 줄이자며 난리인 상황을 보다가 비닐봉지에 담긴 음료를 빨대로 빨아마시고 있으려니 우습게도 '이렇게 비닐을 많이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게도 주스 맛은 그저 그랬다.
망고도 제철이 아닌데다가 얼음을 너무 많이 넣어서 생각했던 것만큼 진한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원한 맛에 쪽쪽 빨면서 거리를 걸었다.
다시 리틀 인디아.
여자 혼자 여행에 밤 늦은 시간이라 아예 모르는 길을 헤매는 것보다는 좀 더 걸리더라도 아까 눈으로 익혀둔 길로 가는 것이 더 안전할 거 같아서였다.
치마를 사서 가자
동남아시아의 겨울을 무시하고 여행을 떠나온 덕에 갈아입을 옷이 별로 없었다.
인도여자들은 배는 노출해도 다리는 드러내니까, 내가 찾는 발목까지 오는 단정한 롱스커트를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결국 샀다.
허리는 고무줄이고, 딱 복숭아뼈까지 내려오는 기장이었다.
면 재질인데 색이 짙어서 안도 안 비치고, 뭐 묻어도 티도 안 날 거 같았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었지만, 여행 내내 유용하게 잘 입었다.
나홀로 여행자, 특히 여성의 경우 제일 걱정되는 건 역시 안전이다.
여행 짬밥은 적은 건 아니라도 밤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려니 조금 무서운 마음도 있었는데, 생각보다는 안전했다.
조지타운은 관광지구이다보니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지만, 말레이시아도 밤문화를 즐기는 분위기인 거 같았다.
밤 9시가 넘는 시간인데 문을 연 음식점이나 노점들도 꽤 있고, 현지인들도 늦은 식사를 하거나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낮이 더우니 선선한 밤에 노나보다.
편의점 앞에 있을 법한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에 부르스타와 냄비를 놓고 뭔가 끓여먹고 있는데, 아마도 꼬치 비슷한 거 같다.
하지만 꼬치를 먹고 싶은 건 아니었고, 내가 관심이 가는 건 저 디저트.
저녁을 먹었지만, 원래 밥 배와 디저트 배는 따로 있는 법이잖아요?
호텔에서 걸어서 2-3분 정도 거리로 가깝기도 했고, 페낭에서의 첫날밤을 그냥 보내기에는 좀 아쉽기도 했다.
아이스 카창
말레이시아의 대표 디저트 중 하나인 아이스 카창 Ice Kacang 을 주문했다.
줄여서 ABC (Air Batu Campur) 라고도 하는데, 말레이시아 스타일의 빙수다.
원래 빙수 위에 콩이며 옥수수, 팥, 젤리, 첸돌, 과일 등을 얹어주는데, 딸기시럽에 아이스크림만 얹어줘서 좀 당황스러웠다.
주문이 잘못 들어갔나? 싶었지만, 이야기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먹었다.
가격은 6링깃 (약 1,700원) 인데, 양이 프랜차이즈 카페 빙수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맛은 얼음에 딸기시럽과 코코넛 밀크의 들척지근함 같이 느껴졌는데, 시원하니 맛이 나쁘지는 않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도쿄빙수 비슷한 거 같다.
빙수를 열심히 파먹다보니 부재료들이 다 아래에 가라앉아있었다.
그릇에 먼저 각종 재료를 넣은 뒤 얼음을 갈아 얹었던 모양이다.
위에 올리던 아래에 깔던 맛이야 비슷하갰지만 확실히 비주얼이 안 산다.
동남아 관광객들이 이래서 설빙에 열광하나 싶다.
배도 부르고, 처음부터 혼자 다 먹을 수 있는 양도 아니었던 터라 반쯤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오늘 뭐했지
세번째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하루종일 했던 일을 곰곰이 더듬어봐도 조지타운의 골목을 헤맸던 기억 밖에 안 났다.
나름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구글 지도 없으면 호텔도 못 돌아올 상황이고, 조지타운의 유명한 볼거리도 본 게 없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원데이 쿠킹클래스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내일은 어떻게든 되겠지
나혼자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내 마음대로 일정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어차피 페낭에만 있는데 내일 다시 열심히 돌아다니면 되겠지.
피곤해서 바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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