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조용한 아침이었다.
평일이라 4인실 중 2명은 퇴실을 했고, 도미토리에는 나와 부산국제영화제 자원봉사자 단 둘.
자원봉사자분이 아침 일찍 나가야해서 새벽 6시부터 부시럭거리는 거는 도미토리를 이용하는 이상 감수해야하는 부분이고, 처음 왔을 때보다는 훨씬 지낼만하다.
좀 더 누워서 뒹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지루해져서 금세 일어났다.
원두커피만 한 잔 마시고 아침부터 향한 곳은 고래사어묵 해운대점.
여기는 2년 전에도 왔던 곳이다.
그 당시에는 부산에서 어묵이 유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래사어묵이 유명한 브랜드인 줄은 잘 몰랐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여긴 뭐하는 데인데 이렇게 사람이 많지?' 싶어서 와서 먹어봤는데, 그 때 기억이 나름 좋았으므로 올해도 또 가보기로 했다.
평일인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고래사어묵의 해운대점 오픈 시간은 오전 9시 반인데, 내가 갔을 때는 오전 10시.
게다가 화요일인데 매장 안은 5일장 시장통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이 한글날이구나!
날짜를 보니 10월 9일, 한글날. 법정공휴일이다.
사람 적을 때 와서 먹을 생각에 일부러 평일 오전 시간 대에 찾아온 건데, 요일만 보고 날짜를 안 본 내 탓이다.
구운 통새우말이&어우동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비집고, 어우동 하나와 어묵 하나를 주문했다.
가게 내부에는 앉아서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몇 개 있는데, 거기도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간신히 의자 하나를 잡고,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서 먹기 시작했다.
내가 고른 어묵은 구운 통새우말이였는데, 튀기지 않고 구운 거라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편이었다.
안에 통새우 한마리가 들어있기 때문에 새우살을 씹는 식감도 좀 느껴졌다.
어우동 자체도 휴게소에서 사먹는 오뎅우동 같은게 맛있긴 했다.
하지만 저렴한 가격도 아닌데 일회용 종이그릇에 나무젓가락으로 제공되고, 숟가락도 없어서 국물을 떠먹기도 불편했다.
다음에 부산에 오게 되었을 때 고래사어묵을 또 올 생각은 있지만, 어우동을 매장에서 다시 사먹지는 않을 거 같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센텀시티로 왔다.
평소에도 시간이 촉박한 걸 매우 불안해하는 성격이라 늘 시간여유를 두는 편이지만,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아침 일찍 일어난데다가 고래사어묵에서 너무 사람 많고 시끄럽다보니 나도 모르게 허겁지겁 먹었나보다.
1시간 반 이상 시간이 남아버려서 신세계백화점 식품관 구경을 좀 하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멀리 나가기도 번잡스럽고 백화점 내에도 괜찮은 맛집이나 카페가 많아 돌아다니가 가게된 곳은 JM 커피 로스터스.
백화점 매장 쪽에 입점한 카페 치고는 자체 매장도 넓은 편이고, 약간 구석 쪽이라 사람들도 많이 다니지 않은 곳이라 적당히 삐대기 좋을 거 같아서 간 곳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산과 기장 지역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그린플로트
플로트 float 는 음료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리는 디저트의 일종인데, 그린플로트는 아래에는 에스프레소샷, 중간에는 우유, 맨 위에는 녹차크림과 하겐다즈 녹차 아이스크림이 올려져있어요.
처음에는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다가 그 다음에는 녹차크림와 우유를 섞어 그린티라떼로, 마지막에는 에스프레소와 우유를 섞어서 카페라떼까지 3가지 맛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음료였다
가격은 좀 비쌌지만.
참고 : 센텀시티 신세계백화점 카페 - JM커피 로스터스 JM Coffee Roasters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오늘이 첫 영화는 '다카 내 사랑 Sincerely Yours, Dhaka' 라는 방글라데시 영화이다.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를 배경으로, 11명의 감독이 각자의 시선으로 '다카' 라는 도시를 바라보는 방글라데시 최초의 옴니버스 영화이다.
상영시간이 2시간 15분인 긴 영화였지만, 11편의 단편으로 나뉘어져있기 때문에 각 영화마다는 시간이 짧아서 상대적으로 훅훅 지나간 느낌이었다.
주제는 스타를 꿈꾸는 무명배우부터 술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여학생들 같은 비교적 대중적이고 가벼운 주제부터 남녀간의 데이트폭력, 방글라데시 내의 민족갈등 같은 사회적이고 무거운 주제까지 다양했다.
방글라데시 절대 안 갈 거야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소감을 딱 한 마디로 '안 가!' 이다.
방글라데시가 치안이 별로 안 좋고, 성추행 같은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영화로 접한 방글라데시는 너무 무서웠다.
한밤 중에 강도가 칼도 아닌 총을 들고 협박을 하고, 아닌 대낮에 길거리에서 실탄이 든 총을 줍는다.
길에 세워둔 차를 통째로 도둑맞기도 하고, 당장 수술이 급한 중병의 환자를 병원비 못 낸다는 이유로 복도에 이불 하나 깔고 누워있게 하고...
원래부터 방글라데시는 여행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긴 했지만, 이번 계기를 통해서 절대 가지 말아야겠다 라는 생각을 완전히 굳혔다.
영화가 끝나고 GV시간이 있었다.
차를 분실한 후 차값을 도둑맞아 고생하는 '다카 메트로 Dhaka Metro' 의 마흐무둘 이슬람 Mahmudul Islam 감독님, 우연히 길거리에서 총을 주워 갱스터가 되려고 하는 '지본의 총 Gibbon's Gun' 의 라하트 라흐만 Rahat Rahman 감독님, 배역에 입을 양복을 구하기 위해 한 아이의 아버지 역할을 하는 단역배우 이야기인 '엑스트라 Extra'의 누하쉬 후마윤Nuhash Humayun 감독님과 이 영화를 총 프로듀싱한 프로듀서님 등 많은 분이 참여했다.
방글라데시는 영화 산업이 그렇게 발달해있지 않은데, 앞으로 전도유망한 젊은 감독들이라고 했다.
이 영화는 감독들이 '다카' 라는 자신들이 살고있는 도시를 각자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일종의 러브레터라고 했다.
2018년 초 6개월동안 제작했는데, 각 감독들에게 창작의 자유를 전적으로 부여해서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방글라데시에서 제작한 데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는 가벼운 이야기에서 무거운 이야기로, 남녀의 이야기를 번갈아서 배치했는데, 다카는 표면적으로 매우 경쾌하고 시끌벅적한 도시지만 그 내면에는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의도로 영화들을 배치했다고 한다.
총 제작비는 1억원 남짓으로 넉넉하지 않지 않은 금액이라 감독님들이 서로 상부상조해가면서 제작했는데, 부산에서 첫 개봉하는 거라고 한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많았으므로 GV시간동안 질문이 이어졌다.
빨리 화장실 가야하는데...
방글라데시 영화는 3시 15분에 끝나고 GV시간이 있는데, 다음에 예매한 둔 영화 시작 시간은 4시.
같은 CGV센텀시티이긴 하지만 진짜 빠듯하다.
6시간을 화장실을 못 갈 걸 감안하고 아까 영화 시작 전에 최후의 한 방울까지 쥐어짜긴 했지만, 그래도 화장실은 한 번 들렀다 가야할 거 같아서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중간에 나갈까? 하는 찰나에 GV가 끝났고, 나는 바로 일어나서 화장실로 전력질주했다.
하지만 화장실에는 이미 입구까지 줄을 서있었다.
간신히 볼일을 보고 영화관 입장하니 3시 59분, 자리에 앉자마자 간신히 불이 켜졌다.
영화가 시작대고나서도 한동안 진정이 안 되어서 가쁜 숨을 헉헉 댔다.
오늘의 두번째 영화는 '용의 눈 The Year of the Dragon' 이라는 카자흐스탄 영화이다.
1981년 소련 시기에 제작된 옛날 영화인데, 이 영화의 감독은 '최국인' 이라는 탈북고려인이라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모스크바에서 영화를 공부하다가 8월 종파사건으로 소련파가 숙청되면서 소련으로 정치적 망명을 감행했고, 이후 카자흐스탄에 정학해서 영화를 연출했다고 한다.
주제는 뜬금없이 중앙관리들의 부당한 탄압에 저항해서 민족운동을 벌이는 위구르인, 아흐탐과 마임한의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중앙관리 세력은 중국으로, 신장위구르지역은 지금도 중국 내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지역 중 하나이다.
소련은 영화를 중요한 선전수단으로 사용했고, 이 영화가 제작된 시기를 감안하면 이 영화도 상당히 프로파간다적인 영화 중 하나로 보이긴 했다.
실상은 아니더라도 소련은 명목상으로 민족주의적 껍데기는 유지시켜줬으니까.
그런 내용을 떠나서 개인적으로 이 지역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30년전 옛날 영화라고 재미있게 보긴 했다.
하지만 자막이 영 거슬렸다.
영화 자체는 러시아어로 제작되었는데, 투르크어로 된 어휘들이 러시아어로 번역하면서 발음이 달라지는 것도 많았고, 역사적이나 문화적인 내용에서 어색한 부분도 많았다.
자막 제작하시는 분이 러시아어에서 직역했는지, 아니면 여기에 또 영어 자막을 바탕으로 3차번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상번역자분도 이쪽에 전혀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번역 작업을 해서 그런 거 같았다.
보고 나오면서 어느 사람들은 "이게 대체 무슨 영화야. 이 영화 괜히 봤다" 라며 투덜거리기도 했는데, 정말 나처럼 특수한 사람이 아니면 지루할만한 영화긴 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저녁 5시 반.
지하철을 타고 향한 곳은 2호선 금련산역이다.
이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뜬금없이 이 곳에 온 이유는 피맥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여행의 마무리는 술이라고, 부산 여행 기간 중 하루 빼고 술을 마셨다.
이틀은 칵테일바를 갔던 터라 하루는 수제맥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운대에 '갈매기 브루잉 Galmegi Brewing Co.' 라는 유명한 브루잉펍이 있지만, 다른 데를 가고 싶어서 검색하던 중 알게 된 곳이 바로 '솔탭하우스' 라는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 탭하우스였다.
여자 혼자 와서 자리잡고 앉으니, 직원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저희 가게 이용해보셨죠?' 라고 말은 건넨다.
부산 사투리도 안 쓰는데, 너무 단골스러워보였나보다.
페퍼로니&뉴욕치즈피자
그리고 이 곳을 찾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조각피자!
피맥 자체는 좋아하지만 혼자서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 1년 넘게 못 먹고 있었는데, 솔탭하우스에서는 여기에서는 미국식 피자를 1조각 단위로 주문할 수 있다.
내가 주문한 피자는 페퍼로니 피자와 뉴욕치즈피자이다.
참고 : 부산 광안리 맛집 - 솔탭하우스/슬라이스 오브 라이프
그런데 1조각이라고 나오는 크기가 엄청 크다.
코스트코나 이마트 같은 데에서 파는 큰 피자를 6조각한 거와 흡사한 사이즈이다.
처음 페퍼로니 피자가 나왔을 때는 주문이 잘못 들어가서 2조각이 나온 줄 알고 '얘기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당황스러웠는데. 원래 사이즈가 커서 먹기 좋게 반으로 잘라서 제공되는 거라고 했다.
평소 좋아하지 않는 피자 종류지만, 기름지고 짭짤하니 딱 맥주안주로 제격이다.
도우 자체에도 간이 되어있고 너무 두껍지가 않아서, 끝부분 크러스트만 먹어도 맛있었다.
광안샘플러
크래프트 맥주는 광안 샘플러를 골랐다.
부산 로컬브루어리에서 생산한 맥주 중 3종류를 선택할 수 있는데, 왼쪽부터 아키투 브루잉의 '아키투 달맞이', 갈매기 브루잉의 '갈매기 라이트하우스 블론드', 고릴라 브루잉의 '고릴라 IPA' 이다.
내 입맛에는 갈매기 라이트하우스 블론드가 제일 맛있었다.
맥파이 포터
샘플러는 정말 맛보기로 조금씩만 주기 때문에 홀짝거리다보면 금방 잔이 빈다.
피자는 아직 남아서 맥파이 포터를 한 잔 더 시켰다.
포터 맥주 자체가 진한 커피향과 초콜릿향이 난다고 하는데, 끝맛이 캐러멜처럼 달짝지근하다고 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막입이라서 그런지 그냥 묵직한 탄맛에 좀 더 가까웠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주량이 줄어든 건지 피곤해서인지 살짝 취기가 올라왔다.
편의점에서 산 새콤달콤을 우물거리면서 광안리 해수욕장을 따라 걸었다.
부산 온 첫날 비바람에 우산 뒤집혀가면서 해운대 해수욕장 갔을 때에는 파도가 쾅쾅 치더니 지금은 조용조용하다.
오른쪽으로는 광안대교가 예쁘게 블링블링하고 있다.
처음 광안대교 건설할 때 바다 미관을 해친다면서 그렇게 반대가 많았다고 하던데, 지금은 부산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다.
그냥 걷기 아쉬워서 갈매기처럼 바닷가에 발자국도 한 번 남겨보고.
산책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도 많고, 가족, 친구, 커플들끼리 와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
어디선가 폭죽을 가지고와서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혼자 여행하면 외롭지 않냐고 하지만, 가끔 심심하긴해도 딱히 외롭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불편한 거라면 여러 명이서 갈 때보다 숙박비가 비싸다는 거와 식사를 할 때 메뉴 선택에 제약이 있다는 거 정도?
나는 빛이 나는 솔로!
해변 바로 근처에 있는 할리스커피 매장에서는 2019 부산불꽃축제 기간 때 테라스/오션뷰 좌석을 예약받고 있었다.
할리스 MD에 음료 1잔까지 포함해서 1인당 5만원.
저렴한 건가? 비싼 건가? 잘 모르겠다.
사람에 치이고 아둥바둥 고생하는 것보다는 카페 내에서 커피 마시면서 보는 게 좋긴 하겠지만, 뭔가 씁쓸한 느낌이었다.
금련산역에서 광안역까지 지하철 1정거장 정도 걸어와서 다시 해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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