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만큼 볼 건 다 본 거 같았다.
그냥 돌아가긴 아쉽고, 지도를 보며 길을 따라 쭉 걸어갔다.
근사해보이는 돌건물이 하나 보인다.
안내지도를 보니 '벨 레티로 게이트 하우스 Bel Retiro Gate House' 라고 한다.
1789년 페낭의 주지사인 '벨 레티로 Bel Retiro' 의 방갈로로 지어진 건물로 페낭 힐에서 가장 명망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위로 따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올라가는 계단이 정말 좁고 가파르다.
앗차해서 미끄러질까봐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람도 없고, 운 좋으면 검은잎 원숭이 Dusky Leaf Monkey 를 볼 수 있다고 해서 가본 건데, 원숭이는 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없다.
스카이덱 Skydeck 은 동쪽과 서쪽, 2개가 있는데, 여기는 서쪽 스카이덱이다.
내가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버기카가 오더니 바로 이 앞에서 내려주었다.
여기가 제일 먼저 도착하는 관광 포인트 중 하나인 모양이다.
산으로 좀 가려지긴 했지만, 여기도 꽤 괜찮은 뷰 포인트였다.
더 가야하나...?
벌써 오후 6시가 넘은 시간.
딱히 더 걸어간다고 해도 그닥 볼거리도 없는 거 같고, 일행도 없이 혼자 사람없는 산길을 걷는 건 안전상 좋지 않을 거 같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모기는 또 언제 물렸냐.
말레이시아는 말라리아 위험 국가 중 하나다.
여행 다녀오면 1달간은 아예 헌혈이 안 되며, 1달이 지나도 혈장 헌혈만 되고 전혈은 안 된다고 한다.
다행히 쿠알라룸푸르와 페낭 조지타운만은 말라리아 위험 지역이 아니라고 한다.
페낭힐은 1800년대 초반부터 휴양지로 개발되었고, 1905년에 푸니쿨라 철도가 완성되었다.
이 기차는 초창기에 운행하던 차량으로 1923년부터 1977년까지 50여 년간 운행했으며, 당시에는 올라가는데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작은 차량에도 등급이 있는데, 앞쪽은 2등석이며, 뒤쪽이 1등석이다.
이대로 올라간다면 앞쪽이 좀 더 시야가 좋을텐데, 왜 2등석인지 모르겠다.
광장 한켠에 마련된 '더 해비타트 The Habitat' 부스를 얼쩡거리며 구경했다.
말레이시아의 열대우림에서 자연경관도 구경하고, 여러 가지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게 마련해놓은 투어프로그램었다.
가격은 성인 기준 50링깃(약 14,200원).
지금은 오후 5시 이후는 선셋 워크 타임이라 가격이 인상되어 70링깃(약 2만원).
궁금은 하지만 가격이 비싸 살짝 망설여지긴 했지만, 어차피 탕진잼하려고 떠나온 여행.
눈 딱 감고 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차가 데리러 올 거예요."
"바로 가는 게 아니예요?'
"여기서 차를 타고 투어 시작 장소로 이동해야해요. 7시부터 시작해요."
"몇 시에 끝나나요?
"1시간 정도 걸려요."
7시에 시작해서 끝나면 8시... 버스를 타고 조지타운 돌아가면.... 도대체 몇 시인거지?
혼자, 특히 여자 혼자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곧 해는 질 거고, 깜깜한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건 여러 모로 위험한 일이다.
게다가 버스가 몇 시까지 운행하는 지도 몰랐다.
아쉽지만, 투어를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너무 시간이 늦은 거 같아요."
아직 결제 전이었고, 사정 설명을 하니 직원들은 흔쾌히 이해해주었다.
조지타운으로 돌아가기 위해 푸니쿨라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게 다 줄이야...?
올라올 때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걸 보았지만, '그냥 일시적인 거겠지..아니겠지.....' 라고 대충 보아넘겼었다.
그런데 줄은 더 늘어났고, 정류장은 어디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어림잡아도 1km 는 족히 되는 거 같았다.
줄은 정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줄어들었다.
늘 이런 긴 대기줄이 있는 것인지 아예 태양을 피하기 위한 차양막까지 쳐저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노멀 레인 Normal Lane 이 있고 패스트 레인 Fast Lane 이 따로 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노멀 레인.
패스트레인은 따로 줄이 있지 않았는데, 가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곤 했다.
패스트레인은 20RM (약 5,700원) 이라고 쓰여있는데 앞에 가서 확인하거나 물어보고 싶지만, 일행이 없다보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나홀로 여행에 대해 불만이 전혀 없었는데, 처음으로 불편했다.
그나마 화장실 생각이 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아.. 저기로 빨리 가고 싶다....
다이빙이라도 하고 싶다.....
기다린지 어언 30여 분.
드디어 고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30도에 가까운 날씨에 탈 알바라니!
여기나 저기나 남의 돈 벌기 쉽지 않구나.
기다린지 1시간쯤 되니 이제 아예 포기상태다.
얼얼하고 욱신거리는 발을 참아가며 서 있는데, 옆 줄에서는 늦게 온 사람들이 그냥 휙 지나가버렸다.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패스트레인 티켓을 사야했구나
페낭힐 푸니클라 티켓은 노멀과 패스트레인, 2종류가 있었다.
내가 멋모르고 갔던 노멀 티켓은 왕복 기준 30링깃(약 8,500원)이고, 패스트레인은 80링깃 (약 23,000원) 이었고, 패스트레인 티켓 구매자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것.
내려올 때만 편도로 패스트레인을 이용하고 싶은 경우는 20링깃(약 5,700원)을 추가 지불하고 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
평소에도 내려오는 줄은 긴 편이지만, 내가 간 날은 토요일인데다가 타이푸삼 축제를 맞아 페낭을 방문한 사람들까지 겹치다보니 줄이 더더욱 길었던 것.
미리 알았다면 얼마 더 내고 패스트레인 티켓을 샀을 거다.
몰라서 마냥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오후 7시 40분, 기다린지 1시간 20분 가까이 되어서야 드디어 푸니쿨라에 탑승할 수 있었다.
떠난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푸니쿨리가 산 아래로 내려갈수록 정말 감격스러웠다.
드디어 산 아래 도착했다.
교황 성하처럼 바닥에 무릎꿇고 땅에 입이라도 맞추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름 널널하게 잡은 여정이 이렇게까지 힘들어질 줄 몰랐다.
그런데 왜 버스가 안 오냐
버스를 타고 조지타운으로 돌아가야하는데, 이젠 버스가 안 온다.
우리나라처럼 '몇 분 뒤 도착' 같은 알림을 해주는 시스템이 아니다보니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낚시 바늘도 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던 강태공이 되어 세월을 낚는 수 밖에 없다.
올지 안올지 모르는 님을 기다린지 또 30분.
어두워지기 전에 조지타운에 돌아가기는 커녕 이젠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두려워졌다.
우버를 열심히 불러봤지만, 근처에 응답하는 차가 한 대도 없다.
따불이 아니라 따따블이라도 달라면 줄 텐데.
드디어 버스가 온다!!!!
어떻게든 타야한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달려갔으나 버스는 운행을 마친 듯 불을 전부 끄고, 기사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 사이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온 사람들이 버스정류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벌써 밤 9시에 가까운 시간.
드디어 또 다시 버스가 한 대 왔다.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차는 밤 10시에 출발해요."
또 1시간을 기다려야하나.
눈 앞이 캄캄해지려는데, 아까 와서 세워둔 버스에 기사가 올라탔다.
다들 눈이 시뻘개져서 미친 듯이 버스를 향해 달려갔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버스를 타야한다는 사실을.
자리에 앉고 나니 이제서야 한숨을 돌렸다.
밤 9시 반.
버스는 제티 터미널까지 가지만 그쪽 길은 좀 어두운 편이라 유동인구가 많은 콤타에 내렸다.
발바닥에서 불이 나는 거 같았지만 좀 돌아가더라도 가로등 환하고 차와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 위주로 걸어갔다.
말레이시아는 치안이 안전한 편이고, 조지타운은 그 중에서도 관광지구라서 밤길을 혼자 다녀도 그렇게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특히 호텔이 있는 골목 쪽은 좀 어두침침해서 특히나 주의를 기울였다.
아 죽겠다
피로와 땀에 쩔은 모습으로 호텔에 돌아오니 모든 긴장이 풀렸다.
샤워를 할 기운조차 없어 침대에 주저앉았다.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만신창이였다.
저녁을 먹어야하나....
아침에 KFC에서 먹은 닭죽과 치킨 1조각, 페낭 힐에서 먹은 블랙커런츠 에이드 1잔이 오늘 먹은 것에 전부였다.
피곤과 걱정 때문에 배고픈 줄도 모르고 그냥 다녔다.
저녁을 먹긴 먹어야할텐데 밤 10시에 운영하는 식당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있다고 해도 꽤 나가야 할 거 같아서 귀찮았다.
여기 하는구나!
전날밤 거니플라자에서 우버를 타고 오면서, 투숙하는 호텔 근처에 음식 노점을 얼핏 봤던 기억이 났다.
낮에는 운영하지 않고 밤에만 운영하는 곳인데, 기억을 더듬어 찾아갔더니 다행이 영업 중이었다.
국수를 파는 음식 노점 뿐만 아니라 차와 커피를 파는 음료 노점과 디저트 노점까지 같이 있었다.
파는 음식은 퀘이테통 Kuay Teow Th'ng 하나 뿐.
페낭 지역의 대표적인 스트리트 푸드 중 하나이자 아직까지 안 먹어본 음식이었다.
퀘이 테 통 큰 사이즈 한 그릇과 아이스 밀크티를 시켜놓고 정말 정신없이 먹었다.
뜨끈한 국물과 부드러운 국수가 배 안에 들어오니 오늘 하루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노곤노곤 녹아내렸다.
5분도 안 되어 국수 한 그릇을 싹 비우고 아이스 밀크티를 쪽쪽 빨면서 땀을 식혔다.
길고 힘들었던 하루가 그렇게 끝났다.
말레이시아 여행 일정을 통틀어 가장 힘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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