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고 콤타르로 가는 길 중간에 내렸다.
바투 페링기로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정류장 안내에서 '슬리핑 부다 Sleeping Buddha' 라는 정류장이 있었다.
'이게 뭐지?' 싶어서 구글 검색을 해봤더니, 페낭에서 꽤 유명한 태국식 절이라고 한다.
정식 이름은 '왓 채야 망가라람 Wat Chaiya Mangalaram'.
까짓 거 종교 대통합 한 번 이뤄보자
조지타운에서 중국 불교 사원, 도교 사원, 힌두교 사원, 이슬람 모스크, 교회, 성당까지 다 둘러봤다.
이렇게 된 거 태국 절까지 가서 종교 대통합을 한 번 실현해보자는 오기 아닌 오기가 들었다.
내리고 보니 거리 이름이 Lorong Burma, 부르마 (미얀마) 거리다.
미얀마와 태국은 그닥 사이가 좋지 않다.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와 미얀마의 퉁구왕조, 알라웅파야 왕조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300년 가량 전쟁을 했던 역사가 있다.
지금도 태국 아유타야를 가보면 불상의 목이 뎅겅뎅겅 잘려나간 경우가 많은데, 그게 아유타야를 침공한 미얀마가 잘라간 거라고 한다.
종교라도 다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똑같이 불교 믿는 나라끼리 왜 그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막상 와보니, 두 나라의 운명은 더 얄궂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태국 절과 미얀마 절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누구네 부처님이 더 힘을 센 지 맞짱 뜨는 건가?
먼저 왓 채야 망카라람 태국 사원을 먼저 찾았다.
원래 가려고 있던 슬리핑 부다 Sleeping Buddha 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여기가 관람시간이 좀 더 짧다.
둘 다 관람시간은 오후 6시이지만, 와불이 있는 본당의 경우는 5시에 문을 닫는다.
이미 시간은 오후 4시 반이 넘었던 터라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황금옷을 입은 부처님이 베개를 배고 누워있었다.
그 길이가 무려 33m 나 되는데, 세계에서 몇 손가락으로 큰 와불이라고 한다.
태국 방콕에 있는 왓 포 Wat Pho 에도 굉장히 큰 와불이 있어서 발가락 쪽에서 찍지 않으면 한 화면에 담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그 와불의 길이가 46m 였다.
그래도 여기 와불은 키가 좀 짧둥해서 비교적 수월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부처님의 얼굴이 은근은근하면서 오묘하다.
이 와불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면서 완전한 평온을 얻는 모습이라고 한다.
소파에 누워서 TV 보는 거 같은데...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부처님의 제자들이 주변에 둘러앉아서 슬퍼하고 있고, 석가모니 본인도 독버섯 먹고 식중독으로 고통스러울 텐데, 눈가에서 귀찮음이 묻어난다.
일요일 낮, 소파에 드러누워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를 보는 거 같은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래도 부처님이니 일단 삼배부터 하고, 본당 안을 돌아다녔다.
여긴 누가 봐도 태국절이구나
2016년 사망한 故 푸미폰 국왕과 시리킷 왕비의 사진이 절 한켠에 놓여져있다.
태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한번쯤 느껴봤을 테지만, 태국인들의 국왕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다.
태국은 1932년 이후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국왕은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꽤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강력한 왕권의 이념적 바탕은 불교에 두고 있는데, 국왕은 불교를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제도적으로 보호해주며 불교는 국왕의 통치권력을 지지하고 정당화해주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왕즉불 王卽佛 (왕은 곧 부처이다) 와 어떤 면으로는 비슷한 맥락이다.
왕은 통치자인 동시에 불교의 수호자로서, 태국 절에서는 왕과 왕비를 위한 제단이나 사진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크기도, 재료도, 색깔도 다양한 불상들.
유명한 고승들의 동상.
겉면에는 신도들이 금박을 사서 한 겹 한 겹 붙여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어난 시를 중시하는 것처럼 태국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요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월요일/화요일/수요일 오전/ 수요일 오후/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이렇게 총 8개로 구분하는데, 요일 별로 수호 불상 (호신불) 과 색이 정해져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예전에는 옷도 요일에 맞춰서 입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난 요일은 금요일.
금요일의 수호불은 가슴앞에 두 손을 포개고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고통의 원인을 설명한 방법을 찾는 부처의 모습이라고 한다.
참고로 색깔은 파란색이다.
와불을 모신 단상 아래에는 부처님의 일대기와 관련된 부조들이 붙어있다.
라피스라줄리처럼 진한 파란색에 황금으로 된 부조를 붙여놓으니 고급스러우면서도 화려하다.
하나하나가 부처님의 일대기와 관련된 사건에 대한 내용인데, 문외한인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이거 하나 뿐이었다.
흰 코끼리가 나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를 잉태한 마야 부인 (석가모니의 어머니) 의 이야기다.
불심으로 대동단결
벽까지 빼곡하게 불상이 붙어있는데, 너무 작고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좀 징그러웠다.
환공포증 올 뻔.
동남아시아 여행을 하면서 본 불상의 특징 중 하나는 불상에 주황색 천을 둘러준다는 점이다.
불상을 보면 아예 헐벗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처럼 자체에 옷주름 무늬가 있는 일체형인데도 그렇다.
주황색 천은 이쪽 지역 스님들이 입는 법복과 비슷해서, 부처님께 옷을 입혀드린다는 의미라고 한다.
본당 문 닫을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늦지 않게 와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직 5분 남았으니까 서둘러 보고 오세요."
어디선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들려왔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었다.
페낭 여행을 하면서 한국인 관광객들은 거의 보지 못했고 몇몇 지나친 사람들도 2-3명 정도의 자유여행객이 전부였는데, 단체 관광객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다.
보통 페낭을 찾는 배낭여행객들은 랑카위나 코타키나발루 등과 같이 묶어서 길어아 2~3일 정도 머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간이면 조지타운 좀 돌아다니고, 페낭힐이나 바투페링기 등 외곽에 유명한 곳 한두 군데 돌아다니기도 빠듯해서 여기까지 오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하다.
그래도 이 지역에서는 꽤 유명한 곳에 입장료도 없어서인지 단체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올 거면 일찍 오지, 있는 관람객도 다 나오고 문 닫고 있는데 도착할 건 뭐람.
우루루 들어갔다가 휘뚜루마뚜루 보고는 다들 그냥 나왔다.
아까는 시간이 빠듯해서 들어가기 바빴는데, 마음의 여유를 찾고 나니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온다.
본당 앞에 있는 조각상들이 태국 왕궁이랑 왓 포 Wat Pho 갔을 때 본 것들과 비슷하다.
그런데 태국에서 계단난간 같이 길쭉한 곳에는 뱀이나 나기 신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뱀) 의 형상이었던 거 같은데, 여기는 용이다.
수염도 있고, 여의주까지 물고있는 걸로 봐서는 누가봐도 용.
태국 절이지만 페낭은 중국계가 많이 사는 곳이라 이것도 퓨전인건가.
밖에도 불당이 마련되어 있다.
여기네는 팔이 8개인 부처님 앞에 남녀 둘이 참배를 드리고 있다.
본당 안에서는 향을 피울 수가 없었는데, 여기는 야외라서 그런지 향을 피울 수가 있어서 하나 피워놓았다.
본당 옆 쪽에도 작은 불당이 하나 더 있다.
여기는 머리 수로 승부하는 건가
앞에 자잘자잘하게 작은 불상들이 놓여있고, 자세히 보면 벅에도 다 부처님 문양으로 되어있다.
막상 여기에 메인 부처님은 크기만 크지, 뒷방 늙은이처럼 밀려난 느낌이다.
그 와중에 불상 하나하나마다 옷 입혀주고, 빨간 리본까지 매어준 정성이 참 섬세했다.
인형놀이 같긴 하지만.
담장 너머에 있는 큰 파고다인지 스투파인지로 발길을 재촉했다.
막 오후 5시가 넘었는데, 여기도 5시까지만 공개를 하는 건지 관리자가 돌아다니면서 정리를 하고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1층이 열려있길래 안으로 쏙 들어갔다.
참배객인 것처럼 가방을 내려놓고 절을 하고 있으니, 관리자도 나가라는 소리는 못 하는 눈치다.
삼배를 하고 난 후, 사진을 한 장 찍고는 후딱 밖으로 나왔다.
퇴근시간은 소중하니까.
나오면서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다고 합장으로 인사하니 씩 웃으셨다.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스투파가 화려하다.
자세히 보면 한 층마다 빨갛고 파랗고 알록달록한 도깨비 같은 것들이 천장을 떠받들고 있는 모양새다.
여기 안에는 불상이 아니라 고승의 조각상이 모셔져있다.
안 그래도 따가운 햇살에 황금빛 타일이 번쩍거려 눈이 부셨다.
이제 여기가 마지막.
황금색 부처님에 황금색 천으로 옷을 둘러주고, 황금색 그릇에 노란색 메리 골드 꽃을 잔뜩 올리고, 벽에는 황금색 부처님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야말로 황금 대잔치.
마르코 폴로가 갔던 데가 태국이 아니었을까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보면 '황금의 나라 지팡구'가 있다는 내용이 있다.
보통 일본이라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황금색 스투파들이 번쩍번쩍한 태국이나 미얀마가 좀 더 황금의 나라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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