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추적거리는 날씨였다.
같은 방은 썼던 3명의 사람들은 벌써 다 퇴실을 한 모양이다.
씻고 아침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조식 시작 시간인 8시가 지났는데, 라운지에는 사람도 없고 불도 아직 안 켜져있다.
아침도 전날 밤에 봤던 그대로다.
냉장고에 빵이나 우유가 있지만, 사람도 없는데 막 꺼내먹어도 되나 싶어서 아예 손도 안 댔다.
잠깨게 커피라도 마시고 싶은데, 동전을 넣고 사용하는 자판기다.
게스트하우스에 보통 믹스커피나 원두커피는 비치되어 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물론 이것도 게스트하우스의 규정이고, 무료로 커피를 제공할 의무는 없으니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데 마침 지갑에는 지폐 뿐이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 바꿔줄 사람도 없어서 커피를 못 마시니 더 짜증이 났다.
안 그래도 침대 자리를 1층으로 바꾼다고 얘기를 하려고 앉아서 기다렸다.
전날 받아온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북을 뒤적거리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영 직원이 보이지 않는다.
이 게스트하우스 직원들은 대체 뭐하는거지?
아침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제일 바쁜 시간이다.
조식도 준비해야하고, 투숙객들이 이것저것 물어보거나 요구하기도 하고,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사람들도 맞이해야하고, 빈 방이 있을 경우 틈틈히 청소도 해야한다.
직원이 리셉션 자리에 없더라도 오가면서 안 마주칠래야 안 마주칠 수가 없다.
그런데 조식이 끝나는 시간이 10시까지 결국 사람이 안 왔다.
11시 영화라 시간이 없어 잘 때 입으려고 챙겨간 옷을 옮기고 싶은 자리 위에 놓고 영화를 보러 나섰다.
해운대 전통시장
숙소에서 메가박스 해운대 가는 길에는 해운대 전통시장이 있다.
어차피 가는 길에 시장 구경이라도 할 생각으로 일부러 지나갔는데, 날씨도 궂고 시간이 일러서 이제야 장사 준비 중이다.
옵스
이름이 낯설지 않은 게 가이드북에서 얼핏 본 거 같다.
아침도 못 먹었는데, 저기서 요깃거리나 사갈까.
빵이나 샌드위치 하나 살 생각으로 안으로 들어갔는데 발 디딜틈없이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나중에 알고보니 30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유명한 베이커리로, 부산 몇 대 빵집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라고 한다.
유명하다는 왕슈크림빵이랑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다.
매장 내에 좌석이 많지 않은데, 브런치 메뉴도 판매하는터라 빈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
계산하는 순간에 막 일어나시는 분이 계셔서 운좋게 그 자리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왕슈크림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얇은 껍질 안에 몽글몽글한 슈크림이 정말 터질 듯이 가득차있었다.
잘못 베어물면 슈크림이 손으로, 테이블로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크림만 먹어도 너무 달지도 않으면서 부드러운게, 평소 아침을 잘 먹지 않는 나도 부담이 없을 정도였다.
예매해둔 영화가 상영되는 장소인 해운대 메가박스에 도착했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는데, 오늘 보려고 예매했던 영화 3편이 전부 해운대 메가박스 TM관에서 상영된다.
티켓팅을 하고,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불길했다.
급히 화장실에 다녀오니, 역시나이다.
부산여행 기간 중 만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몰랐다.
상영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급하게 뜨거운 둥굴레차와 진통제를 입 안에 털어넣었다.
좌석도 넓고 앞에 무려 테이블까지 놓여있는 프리미엄 상영관이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는 주최 측에서 CGV와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메가박스 해운대점을 임대해서 상영을 진행한다.
유명한 스타가 출연한다거나 언론이나 평론가의 주목을 받는 작품은 큰 상영관에서 상영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영화들은 관객 자체가 적어서 상영관도 작다.
그러다보니 나처럼 비인기, 비주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의도치 않게 이런 프리미엄 상영관에서 관람을 하게 되는 경우가 꽤 많다.
테이블이 있으니 음료나 간식거리, 개인 소지품 등을 놓을 수 있어서 편했다.
첫 작품은 아시아단편 경쟁 1이다.
짧은 10분대에서 길어도 30분 정도 길이의 아시아국가의 단편영화 3-4편을 한꺼번에 상영을 한다.
아시아단편 경쟁 1 에선 네팔 영화 '새의 해 Year Of the Bird' . 카자흐스탄 영화 '오프-시즌 Off-Season', 동티모르 영화 '메모리아 Memoria', 이렇게 3편이 상영되었다.
네팔 영화 '새의 해' 는 어느 승려와 어린 동자승이 수행을 위해 산 중적에 있는 굴로 떠나서 지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히말라야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안거 과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모습을 보면서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 네팔스러운 영화' 라는 느낌이 들었다.
카자흐스탄 영화 '오프- 시즌' 은 이름 그대로 비수기의 황량한 초원이 배경이다.
허허벌판에 덜렁 놓여져있는 집 한 채에는 늙은 양치기와 젊은 아내, 그들의 어린 아들이 살고 있다.
키르기즈 작가 칭기즈 아이트마토프의 '자밀라' 라는 소설이 떠울랐다.
소련 시기에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화가 되었는데, 그 영화를 본 적이 없지만 아마 이 영화와 비슷한 느낌이기 않을까 싶다.
영화 소개에는 '아내의 외로움과 은밀한 욕망은 태양만큼 뜨겁다' 라고 되어 있지만, 실상은 가끔씩 그곳을 찾는 젊은 청년이 아내를 강간하는 내용이라 조금 의아했다.
동티모르 영화 '메모리아' 는 인도네시아와 분쟁을 벌이던 동티모르 독립운동 시기 군인들에 의해 성적으로 학대를 당한 마리아의 모습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후에 그녀는 결혼을 했으나 외국인에게 몸을 판 여자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하고, 자신의 딸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한다.
동티모르 판 '귀향' 으로, 보는 내내 굉장히 먹먹하고 답답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다음 영화까지 2시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 남았다.
미리 진통제를 먹은 터라 배와 허리가 심하게 아픈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몸이 무거운 건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에 번거롭지만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직원은 여전히 없었다.
객실은 그 사이 청소를 한 거 같은데, 새 자리에 옮겨둔 잠옷이 사라졌다.
두고 간 줄 알고 치워놓은 모양이다.
다행이 옷은 금방 찾았지만, 쉴 시간이 별로 없었다.
잠이 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15분 남짓 누워있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다시 일어났다.
비는 계속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메가박스 해운대에 다시 돌아왔다.
원래 오늘은 두번째 영화까지 본 후에 다음 영화까지 4시간 반의 짬에 동백섬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날씨는 계속 추적추적하고, 몸도 어딘가를 다녀올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산까지 왔는데 숙소에서 뒹굴거리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를 한 편 더 보자!
멀리 가지 않고, 같은 영화관 내에서 한 편 더 보는 거 정도는 큰 무리가 없을 거 같았다.
영화야 어차피 가만히 앉아서 보는거니까.
매표소에서 티켓을 직접 구입할 수도 있지만, 교환/양도 부스도 한 방법이다.
구매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큰 차이가 없는데, 판매자는 보지도 못하고 환불도 안 되는 티켓을 맡겼다가 누군가가 사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확률이 생긴다.
양도티켓은 잡는 사람이 임자다.
티켓을 맡긴 사람이 아예 돈을 받을 생각이 없기 때문에 공짜로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양도 티켓으로 나온 아시아단편 경쟁 3과 돈을 내고 구입해야하는 '자얀데루드의 밤' 중에서 뭘 볼까 고민이 되었다.
조금 많은 고민 끝에 결국 선택은 자얀데루드의 밤.
안 그래도 다음에 볼 영화도 단편인데가 평소 믿고 보는 이란 영화고, 사회적 문제작이라는 점이 끌렸다.
현찰로 돈을 내니까 바로 그 자리에서 티켓을 받을 수 있었다.
두번째 영화는 아시아단편 경쟁2였다.
필리핀 영화 '수폿 Supot' 과 미얀마 영화 '법복 The robe', 중국 영화 '침묵의 고통 Pain Silence', 카자흐스탄 영화 '나이트 플라이 Night Fly' 이렇게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보고 싶었던 영화는 미얀마 영화 '법복' 이었다.
학생과 승려가 군부정권에 대항하는 미얀마의 정치 상황에서 군인에 쫓기고 있는 승려를 무슬림 처녀가 도와주는 내용인데, 꽤 괜찮았다.
요즘 같이 종교간의 갈등이 첨예한 시대에 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저렇게 같이 노력하는 모습이 의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 영화 '수폿'도 무난했다.
통과의례를 앞두고 두려워하는 소년의 심리를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두 편의 영화는 좀 이해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카자흐스탄 영화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머리가 온통 멍했다.
뇌가 해체되어 반쯤은 나갔다 온 느낌?
역시 자아니, 자신의 내면이니, 의식의 흐름 같은 단어들이 나오는 영화는 보면 안 되겠구나를 다시 느꼈다.
영화를 마치고 나니 버블티가 너무 먹고 싶었다.
따끈하고 달콤한 밀크티와 쫄깃한 버블을 지금 당장 맛보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처럼 간절했다.
그런데 아무리 검색해봐도 해운대역 근처에는 버블티를 파는 곳이 나오지 않았다.
제일 가까운 곳이 지하철을 타고 3정거장 거리의 센텀시티역 근처.
잠시 그쳤던 비는 다시 부슬부슬 내렸지만, 바람에 뒤집어지는 우산을 들고 주변에 보이는 카페는 다 들어가봤다.
어디에서도 내가 찾는 버블티를 파는 곳은 없었다.
그나마 이디야커피에서 버블티를 팔았는데, 얼음을 넣고 차갑게 만드는 아이스 버블티였다.
빗 속에서 1시간 내내 돌아다니느라 신발이며 바짓자락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평소 같으면 별 것도 아닌일인데, 감정이 미친 듯이 널을 뛰었다.
보는 사람만 없다면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화 시간은 다 되어가고, 결국 버블티는 못 샀다.
하지만 따뜻한 밀크티라도 마시지 못하면 정말 미쳐버릴 거 같아서 아쉬운대로 차이티라떼를 샀다.
다행히 영화에는 늦지 않았다.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암흑.
바로 영화가 시작해서 모든 조명이 꺼졌다.
하필 내 자리는 가장 가운데 자리라서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야하는데,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내 자리가 어디인지도 안 왔다.
1시간동안 버블티를 찾아다니느라 정말이지 멍청이 상태였다.
다른 관객분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자리에 착석했다.
그러고나서도 계속 멍했다.
한동안 유체이탈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다가 따뜻한 라떼를 마시며 간신히 정신줄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차이티라떼는 내가 기대하던 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몸에 뭔가 뜨뜻한 것이 들어가니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자얀데루드의 밤은 1990년에 제작된 이란영화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인 모흐센 마흐말바프 Mohsen Makhbalbaf 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란의 거장감독이다.
나는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소쿠트 sokout'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배경이 타지키스탄이라 이제껏 타지키스탄 영화로 알고 있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고요 The Silence' 라는 이름으로 제 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1979년 이슬람 혁명 시기 전후의 이란을 배경으로, 인류학과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응급실 간호사인 딸이 겪은 사회 변화상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내용 자체보다는 '이란의 영화 검열' 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얀데루드의 밤은 원래 100분 정도의 분량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 검열위원회가 '혁명정신에 어긋난다' 라는 이유로 1/3에 해당하는 37분 가량의 분량을 삭제해버렸는데, 그 나머지 부분은 공공장소에서의 상영을 하거나 영화를 복제하는 것을 통제했다.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된 영화는 63분 분량으로, 일부 복원에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사실을 상영 전에 미리 공지하고 영화가 시작되는데, 그 사실을 알고 봐서 그런지 정말 영화가 어색하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아무런 장치 없이 붕붕 떠버리고,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건 기본이다.
그런데 화면은 나오는데 소리가 제거된 건 좀 당황스러웠다.
아예 자막으로 (검열로 인해 소리가 삭제됨) 이라고 나오는데, 멍하니 흘러가는 화면만 보고 있으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같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웅성거림이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뚝뚝 묻어나왔다.
오늘 3편의 영화를 보았고, 아직 1편이 남았다.
몸은 만신창이다.
조금이라도 쉴 생각에 다시 터덜거리면서 숙소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쉴 생각에 터덜거리며 숙소로 향하는 길이었더.
시내버스 종점으로 보이는 곳에 국밥집들이 줄지어 있는데, 커다란 가마솥에서 발발발발 끓고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식욕이 당겼다.
하루종일 먹은 거라곤 아침에 먹은 슈크림빵 하나와 아메리카노 한 잔, 차이티라떼가 전부였다.
비도 오고, 저녁도 먹어야하는 터라 뜨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이 좋을 거 같아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소고기 따로국밥
주문을 한 지 채 몇 분 되지도 않은데, 음식이 차려졌다.
국밥 한 그릇과 공기밥 하나, 반찬 3가지, 정말 소박한 음식이다.
하지만 맛은 정말 깊고도 진하다.
특별히 들어간 재료도 없는 거 같은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지 신기할 정도다.
게다가 가격이 4,500원, 편의점 도시락 하나 가격이다.
뚝배기에 코를 박고 국밥 한 그릇을 후루룩 비웠다.
하루종일 엉망이었던 몸과 마음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날 내게 이 소고기 국밥 한 그릇은 정말 힐링푸드였다.
참고 : 부산 해운대 맛집 - 원조 할매 국밥
배가 든든하니 기운이 난다.
숙소에 가는 대신에 해운대 해수욕장에 야경을 보러갔다.
해운대는 신기하게 바닷가에 가면 으레 나는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
누구 하나 반겨줄 사람은 없지만, 괜히 분위기를 내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바다까지 왔으니 바닷물에 손도 한 번 적셔보았다.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바닷가에서 산책을 하고, 낭만을 즐기고 있는 와중에 한켠에서는 주말 늦은 시간가지 복구 공사가 한창이다.
전날에 봤던 해운대 해수욕장은 어느 정도 치워져있는 상태였고, 쌓여있는 자잘한 자재들을 봐서 태풍 피해를 어느 정도 짐작했을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완전히 아작나버린 키오스크를 눈 앞에서 보니 정말 무서웠다.
걷다보니 해운대 포장마차촌까지 왔다.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해서인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고양이 세마리.
마지막 영화를 보기 위해 다시 메가박스 해운대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물떡을 먹었다.
작년에 먹어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참 별 맛이 없다.
그냥 물에 불어 말랑해진 가래떡 맛이다.
오늘의 4번째 영화는 이란 영화인 '말라리아'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오리종티상을 받을 작품이다.
이 영화는 테헤란으로 가출을 한 젊은 커플이 그 과정에서 겪는 이야기이다.
초반에는 마냥 낭만적이고 꿈에 부풀어있지만, 연고 없는 낯선 도시에서 현실에 부딪친다.
좋은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 사람마저 곤경에 처하게 된다.
말라리아는 보면서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전지적 작가든, 3인칭 관찰자든, 아니면 1인칭 주인공이든 사건을 바라보는 특정한 시선이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내내 핸드폰으로 영상을 촬영하는 내용이 계속된다.
어디까지가 전지적 작가적 시점이고, 어디까지가 여주인공이 관찰자로서 촬영하는 내용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사건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녹화 중인 영상인 경우가 매우 허다해서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을 읽었을 때의 기분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소설이 진행되지만, 결국 주인공은 누구인지 감이 오지 않던 그 소설, 결국 너무 혼란스러워서 몇 페이지 읽다가 접었지만.
스포일러를 하자면, 결국 커플은 도망치다 못해 동반 자살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여자주인공이 호수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을 녹화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하지만 진짜 그들이 죽었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영상만 남겨둔 채로 어디로 잠적을 해버린건지, 아니면 정말 동반자살을 한 것인지.
액자식 구성이나 수많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구성의 영화는 몇 번 봤지만, 이런 스타일의 영화는 처음이어서 한편으로는 어렵고, 한편으로는 많은 의문이 남았던 영화였다.
마지막 영화까지 다 보고 나오니 밤 10시 가까이 되었다.
영화를 보다보면 하루가 굉장히 빨리 가고, 크게 한 것도 없이 피곤하다.
의도했던 건 아니라고 해도 하루 4타임의 영화를 풀로 보니 그래도 하루를 알차게 보낸 거 같은 뿌듯함이 들었다.
난 부산 관광도 해야한다는 핑계로 영화를 4타임 풀로 보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식사도 제대로 못 챙겨가며 영화를 풀코스로 본다는 사람을 꽤 많이 보았다.
그런 분들을 보면 대단하기도 하고, 영화에 대한 애정과 해박한 지식에 참 부러웠다.
언젠간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세상은 넓고, 배울 건 참 많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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