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보는 맑은 아침이었다.
전날 밤에 체크인했던 사람은 일찍 나가야하는데 알람을 맞춰도 되는지를 물어보더니 벌써 체크아웃을 한 모양이다.
여전히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센텀시티역으로 향했다.
오늘의 첫 영화를 볼 곳은 소향씨어터로, 개인적으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이다.
작년에 이곳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는데, 초등학생 거의 한 학년이 단체 관람을 왔다.
인원이 많다보니 교사든, 스텝이든 통제가 불가능해 좌석도 예약해둔 곳이 그냥 빈 데 아무데나 앉아야했고, 영화도 원래 상영시간보다 늦게 시작했다.
예매해둔 표를 티켓팅할 때 단체 상영이 있냐고 물어보니 없다고 해서 방심했다.
상영관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바글하다.
예매했을 때는 몰랐는데, 어린아이들도 입장이 가능한 시네키즈 영화였다.
게다가 좌석 배치도를 잘못 봐서, 고른 자리가 완전히 외곽이다.
설상가상으로 내 자리 하나만 남겨두고 양쪽에는 아이들이 앉았다.
한쪽에 앉은 아이들은 계속 의자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고 있고, 반대쪽에 앉은 아이들은 뒷자리에 앉은 엄마와 계속 수다를 떤다.
영화 시작 전부터 암담했다.
모바락 - 영웅의 귀환 The Mobarak 은 이란 애니메이션으로, 페르시아의 대표적인 시인 피르도우시의 '샤나메 Shahname' 라는 작품을 현대판으로 적용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샤나메는 이란 뿐만 아니라 중동과 중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 고전 중의 고전이다.
평소에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한국어 번역본도 없고 언어능력도 부족해서 늘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
그런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애니메이션이라니, 부족하다마 기본적인 내용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예매를 했다.
하지만 영화는 정말... 최악이었다.
샤나메에서 따온 건 이름 밖에 없는 듯 했고, 사건의 전개와 결말까지 전부 다 너무 뜬금없었다.
이걸 보느니 차라리 매직키드 마수리를 보지.
영화 자체도 대단히 취향에 안 맞는데다가 영화 중간부터는 한국어 자막이 다 하나씩 밀려버렸다.
내용과 자막이 안 맞아버리니 이해가 안 되서 30분 이상을 영어 자막으로 봐야했다.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고, 다른 사람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한다.
옆자리 앉은 아이는 계속 의자를 덜컹거리다가 자기 아빠에게 화장실 가고 싶다고 칭얼거린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다음엔 절대 소향씨어터에서 영화 안 볼 거다.
버스를 타고 해운대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어야하는데, 나혼자 여행자는 선택지가 많지가 않다.
나름 유명하다는 집에서 밀면 한 그릇을 시켰다.
작년에 부산에 왔을 때도 밀면을 먹어봤지만, 딱히 맛있는 줄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콤달콤하면서도 쫄깃한게 정말 별미다.
이래서 현지인들 사이에 유명한 맛집에 와서 먹어야하는구나 싶다.
참고 : 부산 해운대 맛집 - 춘하추동밀면
두번째 영화는 '늑대와 양 Wolf and Sheep' 이라는 아프가니스탄 영화로, 칸 영화제 감독주간 아트시네마상을 받은 작품이다.
'늑대와 양' 은 특별한 스토리가 있거나 기승전결의 구성으로 사건이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조차도 전문 배우가 아닌 그냥 일반인들이다.
그래서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실 같이 느껴졌다.
아프가니스탄의 어느 시골마을에 가면 이런 일이 지금도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온 것처럼.
영화가 끝나고 감독과의 GV 시간이 있었다.
'늑대와 양'을 연출한 샤흐르바누 사다드 Shahrbanoo Sadat 감독은 2010년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에 선정되어,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받은 적 있다.
보통 이런 영화제에 참석하시는 감독님 같은 경우 중년 이상 되는 게 데부분인데, 얇은 블라우스에 핫팬츠를 입은 젊은 아가씨가 뒷자리에서 백팩 메고 슥 나와서 좀 놀랐다.
감독이라고 안 했으면 그냥 영화제 보러온 외국인 관람객인 줄 알았을 것이다.
샤흐르바누 감독님은 이 영화 제작 과정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서 이것저것 말해주셨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시네마 베리테 Cinema Verite (사실주의적 영화)'라고 소개하면서, 이 작품은 자기가 살았던 아프가니스탄이 고향 마을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서 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단편으로 기획했는데, 아프가니스탄의 사회 상황상 영화 제작이 쉽지가 않아 8년이나 걸렸다고 덧붙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촬영 자체가 힘들기 때문에 중국이나 모로코 등 비슷한 느낌이 나는 장소를 섭외하려 다녔고, 결국 영화는 타지키스탄에서 촬영되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와 타지키스탄을 연결하는 직항 항공편도 없을 뿐만 아니라, 타지키스탄 측에서 '테러 위험'을 이유로 아예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아서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정부 기관이며 대사관 등에 수십 통이 넘는 탄원서와 신원보증을 할 수 있는 서류 등을 끊임없이 제출해야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은 커녕 도시조차도 나가본 경험이 거의 없는 38명의 사람들을 인솔하는 것조차 쉽지 않앗다고 덧붙였다.
그들의 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게도 '나는 이들을 인신매매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야했다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다.
GV 시간이 끝나고 감독님으로부터 사인도 받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페르시아어로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써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Tashakkur' 라고 했더니 '페르시아어를 알아요?' 라면서 굉장히 신기하고 반가워했다.
2번째 영화가 전부 끝나고 나니 오후 3시 반이 넘었다.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남포역으로 향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부산에서 꼭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용두산공원 다녀오기 였다.
4시간 정도의 자투리 시간에 잠깐 다녀올 생각이었다.
부산의 볼거리 중 상당수가 중앙동/남포동 등지에 몰려있는데, 이동시간이 너무 길어서 늘 서둘러야 수박겉핥기식이라도 보고 올 수 있다.
지하철 1호선 남포역 1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용두산 공원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고맙게도 요금도 무료다.
도심 안에 있는 산이 높아봤자지 했는데, 에스컬레이터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한다.
이걸 다 계단으로 걸어올라가야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용두산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부산 가면 용두산공원에 꼭 가볼거예요.' 란 이야기에 주변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했던 이야기가 있다.
너무 기대하면 실망할거야.
실망하더라도 가보고 싶었던 건 작년의 기억 때문이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부산 구경하겠답시고 국제시장 와서 길 잃고 헤메고 있었다.
그러다 부산 타워를 보고 모스크의 미나렛인 줄 알고 흠칫 놀랐었다.
'부산은 굉장히 높은 곳에 이슬람 사원이 있구나' 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시간 관계상 부산 곳곳을 돌아다닐 여유가 없으니 높은 곳에서 전망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꽃시계
용두산 공원에서 가장 사진빨 잘 받는 곳이라고 하던데, 다들 줄서서 사진을 찍는다.
사람 없는 사진 한 장 건지기 힘들었다.
시민의 종
1996년 부산시민들이 기금을 모아서 만든 곳으로, 서울 종로의 보신각처럼 매년 1월 1일 타종식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용두산공원에는 '정수사' 라는 절도 하나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54년 용두동 일대에 큰 화재가 나서 피난민들이 살고 있던 판자촌이 전소되고 점차 우범지역으로 변해갔다.
이렇게 용두산 일대가 황폐화되어가자 이를 안타까워하는 불자들이 1956년 관세음보살님을 모신 사찰을 이곳에 창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광복 이후 나라를 위해 싸우다 좋아하신 부산, 경남출신의 무연고 경찰영령 89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용두산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용 동상도 볼 수 있다.
제주도의 용두암도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보고 정말정말정말 실망했는데, 여기 용도 왠지 비리비리해보인다.
그냥 큰 뱀 같다.
부산타워 앞 난간에도 커플들이 사랑의 자물쇠를 잔뜩 걸어놓았다.
난 왜 이상하게도 이런 거만 보면 시니컬해져서 '저 중에 진짜 결실을 맺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늘 든다.
건물에 가려져있긴 하지만, 바다도 빼곰 볼 수 있다.
부산의 볼거리가 많지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바다인 거 같다.
올라갈까? 말까?
원래 목표는 용두산공원만 보는 것이었다.
남포동, 광복동 근처에 볼거리는 많은데, 해운대에서 오기 쉽지 않다보니 공원만 후딱 보고 내려와서 인근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부산타워 입구까지 오니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서 고민이 되었다.
결국 다른 일정을 포기하고, 티켓을 구매했다.
티켓을 구입하자마자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산 아래 자글자글 모여있는 마을부터 자갈치 시장, 영도대교, 부산항대교 등의 다양한 부산의 풍경들이 눈 앞에 시원하게 펼쳐졌다.
통유리마다 그 뱡향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장소들에 대한 이름이 붙어있다.
하지만 부산에 대해서 잘 모르고, 많이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내가 알아 볼 수 있는 건 몇 개 없었다.
대학 때 이후 계속 살고 있는 서울도 아직 헤메는데, 그나마 몇 개라도 알아본 게 참 용하다.
계단을 따라 한 층 아래로 내려갔다.
꽤 좁고 가팔랐다.
아래층에는 카페와 함께 의자가 몇 개 놓여져 있어서 커피를 마시면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는 풍경 자체는 윗층이나 아랫층이나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사람이 더 적고 조용해서 그런지 더 나은 거 같기도 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다리쉼 좀 하다 1층으로 내려왔다.
북한우표 전시실이 있었지만, 다음 영화를 보려면 시간 여유가 없어서 보지 못했다.
부산타워도 다 봤구나.
하나의 퀘스트를 끝낸 거 같이 뿌듯했다.
올라갈 때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지만, 내려갈 때는 계단으로 내려가야한다.
몇 개인지 세다가 까먹었는데, 100개는 넘었다.
다시 광복로로 돌아오니 오후 6시 무렵.
다음 영화 상영시가는 7시 반 전까지 센텀시티에 도착해야하는터라 서둘러 지하철을 타러갔다.
저녁 먹을 시간도 없어서 길거리에서 씨앗 호떡 하나로 저녁을 떼웠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이나마도 먹지 못할 뻔했다.
내가 산 게 마지막이라 나보다 1분 늦게 온 다른 사람들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센텀시티 역에 도착하자마자 CGV 로 부리나케 뛰었다.
영화 시작 10분 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영화 런닝타임은 2시간 반 정도 되는데, 씨앗호떡 하나로 저녁을 해결하긴 좀 부족할 거 같았다.
처음으로 팝콘에 콜라를 사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세번째 영화는 '샤룩칸의 팬' 이라는 인도영화이다.
이 영화를 본 지인이 '별로다' 라고 했지만, 샤룩칸으로 인도영화에 입문했던 나로서는 영화 내용과 상관없이 '그를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 는 생각 하나로 예매했다.
'내 이름은 칸 My name is Khan' 이라는 영화로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샤룩칸은 이 영화에서 '아리얀 칸나'이라는 슈퍼스타와 그에 열광하는 팬 '가우라브 찬다' 이라는 1인 2역으로 등장한다.
평생 아리얀 칸나를 동경하고 살아오던 가우라브는 그를 직접 만나기 위해 뭄바이로 올라간다.
그러나 자신은 그의 수많은 팬들 중 하나일 뿐이며, 오히려 그가 자신의 팬심을 무시했다고 생각한 가우라브는 그의 안티팬으로 돌변해버린다.
그와 닮은 자신의 외모를 이용해서 스타로서의 그의 평판과 위치를 무너뜨린다.
지인의 말대로 영화 자체는 큰 재미는 없었고, 결말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다만 영화 중간중간 1990년에 풋풋한 샤룩칸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면서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국내 여행 > 2016 부산 [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04. 10/10 부산여행 넷째날 - 재한유엔기념공원 (10) | 2017.06.08 |
---|---|
부산 해운대 빵집 - 옵스 Ops 해운대점 (14) | 2017.01.29 |
부산 해운대 맛집 - 고래사어묵 (29) | 2016.11.15 |
부산 해운대 맛집 - 춘하추동밀면 (46) | 2016.11.03 |
02. 10/8 부산여행 둘째날 - 해운대 야경 (44) | 2016.10.31 |